노동사목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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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택시 노동자의 외침
한낮의 뜨거운 열기가 조금은 가신 이른 저녁 무렵 무심히 내달리는 차들이 지나는 길병원 사거리 한켠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있는 집회 현장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눈을 들어 보니 다리조차 뻗을 공간도 없는 통신탑에 매달려 140여 일을 버틴 택시 노동자 고영기님께서 계신 곳이 보였습니다. 너무나 맹렬했던 폭염 시기를 어떻게 보내셨을지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공짜노동 근절! 시행령을 마련하라!’ 통신탑에 같이 매달려 펄럭이는 프랑카드가 무더운 여름날 저녁 바람에 공허하게 흔들려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택시 노동자 고공농성 수요 문화제’를 시작하며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연대자들의 지지 발언을 들으며 문화공연을 바라보고 있자니 지긋한 나이지만 등자보(몸피켓)를 입고 앉은 택시 노동자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회사에 낼 사납금을 채우고 다만 얼마라도 더 손에 쥐어보려고 무리했던 날들과 장시간 운전으로 고단했을 노동이 그대로 스며 깊은 주름과 피곤한 몸으로 퇴적된 듯합니다. 드문드문 보이는 희끗한 흰머리를 감출 수 없는 나이가 되어서야 빼앗기고 유예되고 미루어진 권리를 알게 된 이들입니다.   ‘일한 만큼 월급 받자!’ 오래된 사납금제는 사납금 외의 수입을 노동자가 갖는 형태이지만 사납금을 맞추기 위해 노동자들은 장시간 노동에 내몰려야 했습니다. 운행에 필요한 경비나 관리부담은 노동자에게 떠 넘겨졌습니다. 이런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1995년 ‘운송수입금 전액 관리제’를 시행했습니다. 그러나 전액 관리제는 정착되지 못했고, 이름만 달리하여 변형된 사납금제도로 오래도록 지속되었습니다. 2019년 사납금제를 폐지하고 소정근로시간을 주 40시간 이상으로 규정하도록 하는 ‘택시발전법’이 개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지역별 적용 시기를 달리하며 미루어지고 유예되고, 결국 2026년 4월 23일 또다시 유예되며 더 불리하게 개악되어 처리되었습니다. 택시 노동자의 권리는 아주 오래도록 무시되어왔고 제도개선을 기대할 수가 없는 상황으로 미루어졌습니다. 밀리고 또 밀려 고공농성을 선택한 이유입니다. 실제 평균 운행시간은 하루 10-12시간에 이르는데도 택시노동을 간주근로제에 포함시켜 소정근로시간을 짧게 산정하여 택시 노동자가 받는 기본급이 적어질 수밖에 없는 이 구조를 바꾸어 달라는 외침입니다. 우리나라 택시 서비스는 외국과 비교하여 저렴한 요금과 고도화된 모바일 플랫폼을 활용한 편리한 교통수단입니다. 그동안 택시업계가 경영난을 이유로 노동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면 바로 잡아야 할 것입니다. 택시발전에 걸맞게 노동자의 처우 개선도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안전한 운행이 사고를 예방하고 나아가 시민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해도 저물어 어두워지고 택시 노동자들은 집회를 마치며 꼭 ‘불패의 전사들!’을 합창합니다. 노래의 가사처럼 “더는 물러설 수 없는” 이들을 자신들이라 여기는 듯합니다. 택시 노동자들의 오래된 외침이 멈출 수 있길 바랍니다. 저마다의 일터로 돌아가 운전대를 잡고 즐겁게 일하시는 모습을 그려 봅니다. 얼마 전 노동부 장관이 현장을 방문했다는 소식에 희망을 품어보며 고공농성이 더는 길어지지 않기를 바라며 발길을 돌렸습니다. * 고영기 택시지부 총무국장은 지난 3월 29일 간주근로제 폐지를 요구하며 맹성규 의원 지역사무실(인천 남동구) 앞 20m 높이 통신탑에 올라 160일째(9/4) 고공농성을 이어가고 계십니다.    
베로니카
일하는 모든 이의 노동권
디지털 전환과 플랫폼 경제의 확산으로 일자리가 급격하게 달라졌습니다. 국제노동기구(ILO)에서는 2019년 [ILO 100주년 선언]을 통해 ‘세계의 노동은 기술혁신 등으로 인한 거대한 전환을 겪고 있다’라고 파악하고 있습니다. ‘발전’을 앞세운 산업의 대전환은 노동 약자의 권리를 고려하지 않습니다.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법인 근로기준법조차 적용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대략 500~800만 명 이상 존재합니다.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 특수고용 노동자, 플랫폼 노동자, 프리랜서 등으로 불리며 일하지만, 합법적 보장에서도 제외되고 있습니다. 하루속히 입법과 제도 개선으로 노동 약자가 더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차별받지 않도록 법적·사회적 안전망이 마련되어야 할 것입니다. 노동 약자의 노동권을 보장하고, 법과 제도에서 배제된 노동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논의가 한층 뜨겁게 논의되고 있습니다. 새로이 ‘일하는 사람 권리 기본법’을 제정하자는 주장도 있고, 기존법을 개정하여 ‘근로기준법’에서 조차 차별받는 현실부터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러한 논의가 논쟁에 머물지 않고 취약계층 노동자에게 실제로 체감할 수 있는 정책으로 나오길 바랍니다. 그리고 일하는 모든 이들의 노동권 실현이 중요한 만큼 노동자 당사자의 인식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미조직·불안정·저임금 등 불의한 노동조건에 의문을 제기하고 부당함을 개선하고자 스스로 변화의 주체가 되어 자신의 일터를 바꾸어 내는 이들이 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노동자를 수동적인 보호 대상이 아닌 자신의 권리를 찾고 공동선을 실천하는 주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신이 처한 현실을 올바로 바라보고 부당한 구조를 개선하려는 노력은 자신을 가치 있게 하고 인격적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일 것입니다. 세상 속에 파견되어 복음을 선포하는 하느님의 협력자로 합당한 모습입니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인간다운 삶을 차별 없이 추구할 수 있도록 급속히 변화하는 사회 속에 모든 일하는 이들이 최소한의 권리와 존중 속에서 일할 수 있는 새로운 제도적 기반이 마련될 수 있어야 합니다. 노동 약자를 보호하는 것은 단순히 시혜적인 복지의 문제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구성원으로 하나 되기 위한 꼭 필요한 과제입니다. 동시에 노동자 스스로가 부당한 구조에 의문을 제기하며 일터를 바꾸어 나가는 능동적 주체로 설 때, 비로소 참된 노동의 가치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산업 대전환이 누군가의 위기가 아니라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일하는 모든 이가 차별 없이 존중받는 인간다운 사회'로 나아갈 수 있길 바랍니다.
베로니카
우리의 하늘은 여직 개지 않았다
산재 유가족들의 기자회견이 있던 날, 밤새 내리던 비는 아침이 되어 잦아들었다. 하지만 하늘은 여전히 잔뜩 흐려 있었다. 혹여 다시 비가 쏟아지진 않을까 염려하며 기자회견 장소인 건설회관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건설회관 앞에는 피켓을 손에 든 산재 유가족들과 종교인들이 서 있었고, 정부 기념행사를 찾은 주요 인사들의 차량이 줄지어 들어섰다. 정오를 넘긴 오후, 푹 찌는 더위는 아니었지만, 검게 얼룩진 바닥의 빗물은 공기를 후텁지근하게 만들었고,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검은 차량들은 유가족들의 애끓는 마음을 더욱 짙게 했다.   묵묵히 서 있었고, 무심히 지나쳐 갔다.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낸 이들의 목소리는 먹먹했다. 유가족들은 안전한 일터를 호소하며 다시 그날의 기억과 마주해야 했다. 상실은 좀처럼 메워지지 않았고, 그리움은 울분이 되어 가슴 깊이 떨려 올라왔다. 유가족들에게 하늘은 여전히 잔뜩 흐려 있었다.   이 글을 적는 지금도, 차마 다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을 떠올리며 부족하나마 기도를 보탠다. 일터의 모든 이가 안전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언젠가는 유가족에게도, 우리 모두에게도 하늘이 맑게 개기를.   * 이날(7월 9일) 기자회견에는 경동건설 故 정순규(미카엘) 님, 인우종합건설 故 문유식 님, 은하종합건설 故 김태규 님, 한익스프레스 이천 물류센터 화재 故 김형주 님, 건설노동자 故 강대규 님의 유가족들과 여러 종교인들이 함께했습니다.  
Fr.비오
아직 끝나지 않은 외침
고진수 노동자(세종호텔지부 지부장)는 올해 1월 14일, 336일 동안 이어온 고공농성을 해제하고 땅으로 내려왔습니다. 세종호텔 앞에 있는 도로 위 10m 높이 좁은 철제구조물에서의 투쟁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의 건강을 걱정했고, 교섭이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방법을 찾겠다는 약속도 이어졌습니다. 저 또한 마음을 보태며 하루빨리 그가 내려오기를, 그리고 그토록 바라던 복직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했습니다. 마침내 전해진 고공농성 해제 소식에 당연히 당분간은 몸을 추스르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농성을 마친 당일에도 사측과의 7차 교섭에 직접 참여한 후에야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이러한 간절함이 교섭에 긍정적인 영향으로 이어지길 바랐으나, 7차와 8차 교섭 모두 "복직이 아니면 의미 없다"는 입장과 "복직 불가"라는 사측의 입장이 평행선을 달리며 합의점을 찾지 못했습니다. 좀처럼 진전이 없는 교섭에 노동자들은 로비 농성을 시작했습니다. 실소유주가 직접 교섭에 나서라는 요구였습니다.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아 복직 안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사측 대표와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측은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로비 농성을 이어가던 어느 날 아침, 해고 노동자들이 일하던 호텔 연회장에서 행사가 열렸습니다. 세종호텔은 경영상의 이유를 들어 식음료부서를 폐지하고 노동자들을 해고했으나, 임대 방식으로 연회장 영업을 다시 시작한 것입니다. 이를 본 해고 노동자와 연대하는 사람들은 즉각 항의했고, 그 과정에서 11명이 연행되었습니다. 연행자 대부분은 조사 후 석방되었지만, 고진수 노동자에게는 구속영장이 신청되었습니다. 다행히 시민 9천여 명이 석방 탄원서를 제출했고, 영장실질심사 결과 구속 사유가 없다고 판단되어 석방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최근 다른 연대 시위에 참여했다가 다시 구속되었고, 56일 만에 석방되었습니다. 이렇게 지나온 시간을 정리해 보니 고공농성, 평행선을 달리는 교섭, 로비 농성, 그리고 두 번의 구속까지... 참 답답하고, 구속이라는 단어가 무겁게 다가옵니다. 현장에서 투쟁하는 해고 노동자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이들이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투쟁을 이어 나가는 이유는 단지 개인의 복직 때문만이 아닙니다. 경영상의 어려움이라는 핑계로 노동자를 쉽게 해고하고, 그 자리를 불안정한 비정규직과 저임금 외주화로 채우는 기업의 행태, 그리고 이것이 당연시되는 사회에 맞서고 있는 것입니다. 이 외침에 의미가 있음을 확신하기에 이들은 오늘도 하루하루 목소리를 냅니다. 노동사목위원회는 월요일마다 세종호텔 농성장 앞에서 해고 노동자와 함께하는 미사를 봉헌합니다. 저는 그때마다 길어지는 투쟁 속에서 노동자분들이 지치지 않기를, 그리고 불쑥 밀려드는 미움과 억울함으로 마음을 다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또 노동이 단순한 생산 도구가 아닌 인간을 목적으로 하는 존엄한 행위임을 다시 되새깁니다. 점점 더 인간을 소모품으로 생각하는 차가운 세상에 맞서, 모두의 노동이 존중받는 날까지 마음을 모아 함께 걸어가고자 합니다.  
솔렌지아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제게 신앙은 당연함이었습니다. 어린 시절엔 주일이면 성당에 가는 것은 정해진 일과였고, 성인이 된 이후엔 청년부 활동을 하며 성당에서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그 시절 저에게 성당이란 공간은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즐거운 곳일 뿐, 신앙에 대해 깊이 생각한 시간은 많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들고 삶의 방향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면서 신앙을 바라보는 시선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고, 이는 노동사목위원회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한층 더 깊어졌습니다. 세상의 아픈 현실을 마주할수록, 교리에서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알아갈수록, 깊어지는 고민은 더욱 어렵게 다가왔습니다. 늘 마음 한편에 그런 고민을 품고 살아가던 중, 노동사목위원회 교육 프로그램으로 가톨릭청년교리모임 '울림'을 기획했습니다. 봉사자들, 신부님과 함께 가톨릭교회교리서의 '그리스도인의 삶' 내용을 살펴보면서 저의 고민은 더욱 명료해졌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신부님께서는 강의에서, 우리가 하느님을 '성당'이라는 공간과 '주일'이라는 시간 안에만 가둬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주일 미사에 빠지면 고해성사를 보고, 미사 시간에는 하느님을 찾으며 기도를 드리면서도 정작 성당 문을 나선 일상에서는 그분을 잊은 채 무심히 살았던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성당 제대 앞에 앉아 있는 ‘나’와 가정과 일터에서 살아가는 ‘나’는 같은 사람임에도, 하느님의 자리와 삶의 자리를 나누어 살아가던 이중적 모습을 돌아보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다운 삶은 내 곁의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일상의 현장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 노력하는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도 정작 그분과 관계 맺는 법을 배우기보다 익숙한 울타리의 편안함에만 머물러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우리의 신앙이 진심이라면, 주일뿐만 아니라 하루하루의 시간 속에서도 그분을 삶의 중심에 모시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다운 삶은 때때로 아프고 버겁습니다. 당장 내 한 몸 건사하고 하루를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지치는 날이 많기에 다른 이의 어려움에 공감하고 손을 내밀라는 이야기는 현실과 동떨어진 말처럼 멀게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노동사목위원회에서 연대활동을 하며 자신의 버거움보다도 먼저 이웃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을 보았고, 불의한 일 앞에서도 용기 내어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도 만났습니다. 신앙의 유무를 떠나 그분들의 삶은 평생을 그리스도인으로 산 저보다 더 그리스도인답게 느껴졌습니다. 해보지도 않고 힘들다 하기보다, 힘겨운 가운데서도 아주 작은 것 하나를 먼저 실천하려 애쓰는 것. 그것이 “믿을교리”를 고백하며 “지킬교리”를 실천하는 모습,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꾸어야 할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이 세상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를 함께 나누고 가난하고 힘든 이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자리는 그리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곳은 성당의 제대 앞만이 아닌 우리가 매일 출근해 부대끼는 일터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표는 성당 문을 나서는 순간 바래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이라는 더 넓은 곳에서 그 가치를 증명하며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것, 그것이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가장 아름답고 거룩한 응답일 것입니다.
마태오
인내
솔렌지아
길 위에 다시 선 ‘쿠팡’ 산재 유가족
작년 말 쿠팡의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건으로 큰 사회적 이슈가 되었습니다. 쿠팡의 도를 넘는 행태가 하나둘 본색을 드러내며 공분을 샀습니다. 대기업 규모의 대관 조직을 가동해 정부, 국회, 노동부 등을 상대로 로비를 시도했다는 기사도 전해졌습니다. 특히 전직 검사와 청와대 비서관 등 고위 공직자 출신을 대거 영입하여 노동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노동부 실무진에게 접촉했다는 기사는, 그간의 산재 은폐와 유족에게 행했던 무자비한 행태 등 쿠팡이 어떤 방식으로 기업을 운영해 왔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쿠팡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쿠지게(쿠팡 지게차 계약직 사원), 헬퍼(소분 등 물류 현장 보조 업무), 워터(부자재 보조·운반 업무), 쿠팡 친구, 쿠리어·플렉서 등 파편적인 형태로 일합니다. 쿠팡 물류센터 한 곳당 일하는 노동자 약 2,500명 중 정규직은 겨우 5~10% 남짓이며, 대부분은 단기 계약직과 아르바이트 등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어디서 왔는지, 내 곁에서 일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 필요도 없고, 알 수도 없는 구조 속에서 이 노동자들은 철저히 ‘노동력’으로만 존재했습니다. 알고리즘에 기반한 자동화 시스템은 노동자를 부품처럼 통제하게 했고, 이는 심각한 노동 강도와 폭력적인 노동 착취를 초래했습니다. 그리고 배송 기사들은 새벽·로켓 배송 시스템 속에서 쓰러져 갔습니다. 결국 많은 쿠팡 노동자가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산재는 매번 은폐되었고, 유가족은 따로 관리되며 대관 조직을 활용한 로비 방식으로 축소되었습니다. 2020년 쿠팡 칠곡물류센터에서 일하던 청년 노동자가 있었습니다. 당시 27세였던 그는 계속되는 심야 노동으로 근무 기간 중 몸무게가 15kg이나 줄 정도로 과중한 업무를 지속해야 했습니다. 코로나19로 대폭 늘어난 작업 물량에 시달리며 인력 충원과 근무 장소 변경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건장했던 청년 ‘장덕준’님은 ‘과로사’로 무참히 생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고 장덕준 님의 부모님은 아들이 죽은 이유를 알고자 하였지만, 쿠팡은 부모님의 애끊는 슬픔을 외면하고 산재 판정 자료 요구에도 협조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합의를 유도하여 유족은 더욱 힘들게 하였습니다. 결국 ‘사과 없는 합의’만 있었고, 유족은 이에 비통해하며 고통 속에 더욱 힘든 나날을 견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5년이 흐른 2025년 12월. 쿠팡이 과로사를 은폐하려던 증거가 언론에 공개되었습니다. “그가 열심히 일했다는 기록이 남지 않도록 확실하게 하라” 이는 정보보호 책임자와 당시 쿠팡 한국법인 대표 김범석이 나눈 메신저 대화의 일부분입니다. 과도한 노동에 시달린 증거를 남기지 말라고 지시한 정황이 드러난 것입니다. 합의 당시에는 전혀 몰랐던 산재 은폐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어머니는 ‘피가 식는 느낌이었다’라며 또 다른 고통에 신음해야 했습니다. 이후 쿠팡을 고발했지만, 4개월째 조사 중이라는 답만 돌아왔습니다. 이러한 고통은 고 장덕준 님의 유가족에게만 일어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2020년 쿠팡 목천물류센터에서 돌아가신 고 박현경 님, 2020년 용인2물류센터에서 돌아가신 고 최성낙 님, 2024년 쿠팡 퀵플렉서로 일하다 돌아가신 고 정슬기 님 등 계속되는 쿠팡 일터에서의 죽음과 그 유가족에게도 유사한 고통은 반복되었습니다. 같은 슬픔을 가진 유가족들은 ‘이대로 두면 같은 문제가 반복될 것’이라는 우려와 ‘더는 안타까운 희생이 없어야 한다’라는 다짐으로 ‘쿠팡 산재 피해 유가족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지난 4월 유가족은 전국 쿠팡 물류센터를 돌며 노동자들에게 머리 숙여 인사하며 전단지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쿠팡 유가족은 쿠팡의 ‘산재 은폐 인정’과 ‘재발 방지 대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쿠팡의 개인정보 유출과 무리한 기업 운영에 반발해 ‘탈팡’을 선택했던 시민들이 다시 쿠팡을 이용한다는 소식에 안타까워하는 어머니의 말씀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낸 슬픔 속에서도 다른 유가족을 보듬으며 애써 웃음을 잃지 않으려는 모습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유가족 1인 시위에 함께 섰습니다. “올여름에는 누구도 힘들지 않게 일했으면 좋겠습니다. 집으로 건강히 돌아갈 수 있길 간절히 바랍니다!”  
베로니카
절제
솔렌지아
오월의 첫 날, 제 이름을 찾다
5월은 참으로 많은 의미가 담긴 달입니다. 어린이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어린이날부터 부모님의 사랑을 되새기는 어버이날, 스승의 은혜를 기리는 스승의 날, 그리고 가톨릭 신자인 저에게는 공휴일이라 더 반가운 부처님 오신 날까지 있습니다. 이토록 다채로운 5월의 문을 여는 첫 번째 날, 바로 ‘노동절’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려 합니다.  노동사목위원회에 갓 입사했을 때, 달력에 적힌 ‘5월 1일 노동절’이라는 글자를 보았습니다. 당시 명칭에 민감했던 저는 웃으며 “오타가 있네요. 근로자의 날인데 왜 노동절이라고 적혀 있죠?”라고 말했습니다. 곁에 계시던 선생님들이 무언가 설명을 해주셨던 것 같은데, 당시엔 그저 ‘근로자의 날’이 정답이라고 믿었기에 그 설명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일을 배우며 ‘노동’이 지닌 참된 의미를 깨달아갈수록, 그때의 당당했던 제 모습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1923년 조선 최초로 세계 노동절 행사를 개최하면서 이 날을 '노동절'이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일제타도’를 외치며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절 행사를 하였고, 해방 이후 맞이한 1946년 5월 1일 노동절에는 전국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주도로 20만 명이 모여 행사를 개최하였습니다. 하지만 군사정부 시절(1963년) 노동이라는 단어가 북한 용어와 비슷하고, 저항적인 이미지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노동절’이라는 명칭은 ‘근로자의 날’로 강제 변경되었습니다.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노동은 ‘사람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하여 육체적 노력이나 정신적 노력을 들이는 행위’라고 나와 있는 반면에, 근로는 ‘부지런히 일함’으로 나와 있습니다. 노동은 노동자가 주체적으로 일을 한다는 내용이지만, 근로는 일을 시키는 사람이 주체로 노동자가 아무런 저항 없이 순응하며 일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노동자인 저는 노예처럼 수동적으로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제 삶과 생계를 위해 주체적으로 일하는 사람이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합니다. 여러 의미로 노동을 되찾기 위해 노동사목위원회에서는 2017년부터 “헌법 제32조 개정 운동 ‘근로’에서 ‘노동’으로” 캠페인을 이어 왔습니다. 처음부터 큰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조금씩 사회가 바뀌어 '근로'가 '노동'으로 제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을 보니 우리 노력이 결코 헛수고가 아니었음을 깨닫습니다. 마침내 2026년 5월 1일은 ‘근로자의 날’이 아닌 ‘노동절’이라는 제 이름을 찾았습니다. 63년 만에 되찾은 이름인 만큼 그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노동 존중 문화의 확산과 더불어 올해부터는 법정휴일로 변경되었고, 게다가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했던 택배기사와 같은 특수고용자까지 포함하면서 노동의 권리가 미치는 범위가 넓어졌습니다. 단어 하나가 바뀔 뿐인데 사회가 바뀌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놀랍습니다. ‘근로자의 날’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부끄러운 과거의 제 모습은, 어쩌면 우리 사회가 노동의 진짜 가치를 잊고 살았던 당시 모습을 그대로 투영한 결과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5월 1일은 하루 더 쉬는 공휴일이 아닌 우리가 주체적인 ‘노동자’로서 존엄을 확인하는 날입니다. 앞으로도 현장의 노동자들과 발맞추며, 노동이 진정으로 존중받는 세상을 향해 함께 걷겠습니다.
도로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