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목이야기

생각을 나누다

제110차 사회적 약자와 함께하는 미사 강론

Fr.비오

우리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 사각지대
학창 시절, 교실에서 선생님들로부터 듣던 말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앞에서 보면 다 보인다”, “선생님은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다같은 말씀입니다. 실제로 뒤에 눈이 달린 것은 아니겠지만, 학생들을 세심히 살피는 선생님의 마음은 책상 아래 숨겨둔 만화책이나 서랍 속 과자까지도 용케 찾아내곤 했습니다.

이러한 기억을 떠올려보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각지대는 단순히 시야각이 닿지 않아 보이지 않는 물리적 영역이라기보다, 우리의 관심이 충분히 닿지 않아 살펴지지 않는 마음의 영역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결국 우리가 의지를 갖는다면 사각지대는 얼마든지 사라질 수 있습니다. 운전할 때 고개를 돌려 숄더체크를 하면 안 보이던 옆 차선이 보이고, 비용을 들여 옵션을 넣으면 경고음이나 화면으로 사각지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각지대란 볼 수 없는 부분만이 아닌, ‘무언가에 의해 가려져 있는 부분으로서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앞만 보고 서둘러 가려는 우리의 속도일 수도 있고, 늘 해왔던 대로의 익숙함을 고수하려는 타성일 수도 있습니다. “이 땅에서 일하는 모든 이의 생명과 존엄을 지향으로 미사를 봉헌하는 오늘, 잠시 멈추어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익숙함과 무관심에 가려진 노동자의 생명과 존엄
모든 이의 생명과 존엄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나와 아는 사람, 내 관심사 안에 있는 사람만이 아닙니다. 비록 지향문에는 이 땅에서 일하는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지만, 이것이 실업 상태에 있는 이들을 배제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외려 이는 우리 모두는 일하는 사람이다라는 것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이의 존엄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누구를 먼저 바라보아야 하겠습니까? 마치 모든 이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는 이들, 가려진 이들을 우선적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대개 높은 곳만 바라보거나 또 앞만 보고 달려가느라, 아래에 있거나 옆 혹은 뒤에 있는 이들은 그다지 잘 살피지 않으려 합니다. 늘 그래왔던 익숙함에 눈을 가리우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영역에 스스로 사각지대를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을 떠올려봅니다. 스마트폰 앱을 몇 번 터치하면 음식이 배달되고, 새벽이면 문앞에 택배 상자가 놓입니다. 처음에는 감탄했던 이 편리함을 이제는 당연하게 여깁니다. “귀찮으니 배달시키면 되지”, “그분들에게 일을 주는 것이니 좋은 것 아닌가?”라며 배달 노동자들의 고단한 처지를 시야에서 슬그머니 가려버립니다. 익숙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법과 제도는 아주 오랫동안 정해진 일터에서, 정해진 시간에, 계약상의 고용주를 따라일하는 이들만을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인정해 왔습니다. 이러한 관성은 땀 흘려 일하는 수많은 노동자를 가려버립니다. 실질적으로는 종속적인 지휘·감독을 받으면서도 개인사업자나 특수고용직으로 분류되는 플랫폼 노동자들, 서류 한 장 없이 노무를 제공하며 법적 보호의 울타리 밖에서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프리랜서와 이른바 ‘3.3 가짜 노동자, 그리고 먼 타국에서 와 이름조차 제대로 불리지 못하는 이주 노동자들이 가려져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노동자가, 일하는 평범한 사람이, 한 가정의 구성원이 우리의 관성과 이기심 그리고 무관심에 가려진 채 생명과 존엄을 위협받고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 사회에서 정직하게 땀 흘리며 살아가고 있지만, 법과 제도의 거울에는 노동자로 비추어지지 못한 채 쉽게 지워집니다. 그리고 그 가려짐의 대가는 낮은 임금과 불안정한 고용, 그리고 반복되는 산업재해 사망이라는 비극이 되어 우리의 지체를 잔혹하게 찢어놓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시선이 닿지 않는 이 사각지대, 우리가 가려버린 그리스도의 벗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합니까? 단순히 안타깝고 불쌍한 사람으로 여기며 시혜적인 태도로 기도에 이름을 올리는 것에 그쳐도 괜찮은 것이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에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바르티매오의 부르짖음과 우리의 응답
교회가 우리에게 전하는 복음의 가르침은 이웃의 아픔에 적선하는 태도를 넘어, 가려진 채 손상된 벗들의 존엄을 다시금 바로 세우는 실천으로 나아갑니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입니다. 때문에 노동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기 이전에,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존엄한 인간이 행하는 거룩하고 인격적인 행위입니다.

따라서 일하는 모든 이가 일터에서 죽지 않고, 안전하며 품위 있게 자신의 일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지켜주는 것은 우리 모두의 공동의 의무가 됩니다. 세상의 편리함과 이익이 땀 흘려 일한 모든 이에게 정의롭게 돌아가도록, 공정한 분배와 정당한 임금을 보장하는 것. 일터에서 억울하게 목숨을 잃는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사회적 안전망(일하는 사람 기본법, 생명 안전 기본법, 정순규 방지법 등)을 만드는 것. 이와 같은 것들을 위해 애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사회적 실천이 되는 것이겠고, 이는 복음의 기쁨을 삶으로도 노래하는 구체적인 모습이 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들은 복음을 떠올려봅니다.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가 길가에 앉아 있습니다. 수많은 군중이 오가는 길이었지만, 그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철저히 가려져 있었습니다. 자신의 아픔을 알리며 자비를 외치는 목소리에도 사람들은 그를 보이지 않는 영역에 억누르려 하며,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습니다. 앞만 보고 바삐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의 서두름과 무관심은, 어쩌면 2천 년 전 바르티매오를 꾸짖던 군중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을지 모릅니다. 인간을 부품처럼 여기고 노동의 가치를 오직 돈으로만 치환하는 방식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는 우리이기에, 오늘 복음 속 바르티매오를 불러오라 하시는 말씀은 여전히 우리들의 마음을 일깨우려 하는 예수님의 음성이 아니겠는가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어떤 목소리를 내며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오늘날의 수많은 바르티매오들에게 잠자코 있으라 꾸짖는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닌지, 아니면 그들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추고 용기를 내어 일어나시게라고 연대의 말을 건네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다시금 오늘 복음 속 그리스도의 음성을 우리의 마음 안에 깊이 담아보았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또한 예수님의 자비를 입어, 가려진 이웃 안에서 그리스도를 찾아 뵙는 눈을 뜨게 되길 간절히 청하며, 바르티매오의 절박한 기도를 우리의 기도에 담아봅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