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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제49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요약)
    • 등록일 2016-01-04
    • 작성자 관리자
    • 조회수 2583
  •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제49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  

    (요약)

    (2016년 1월 1일)

     

     

    무관심을 극복하고 평화를 이룩하십시오.

     

    1. 하느님께서는 무관심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 인류는 소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류를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저는 이러한 근원적인 확신과 더불어 세상의 모든 이들의 미래를 위한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과 평화를 기원합니다. 평화는 하느님의 선물이며 동시에 인간의 업적입니다. 평화는 하느님의 선물이면서 평화를 이룩하라는 부르심을 받은 모든 인간에게 맡겨진 것입니다.

     

    희망의 이유를 견지하기

     

    2. 안타깝게도 납치, 민족 박해나 종교 박해, 권력 남용과 같은 비극적인 결과를 낳는 전쟁과 테러는 지난해의 시작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그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몇몇 사건들은 인류가 심각한 상황에 맞서 개인적 이해, 냉담, 무관심을 뛰어 넘는 연대로 노력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전망에서 저는 자비의 희년에 교회의 기도와 노력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이 겸손하고 연민이 넘치는 마음을 길러 자비를 선포하고 증언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마음은 “용서하고 자신을 내어 줄” 수 있고 “우리 시대의 세계가 종종 비참한 방식으로 만들어 낸 사회의 가장 그늘진 곳에서 살고 있는 이들에게” 자신을 좀 더 열며 “모욕적인 무관심이나 우리의 정서를 마비시키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지 못하게 하는 습관과 파괴적인 냉소주의”에 빠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양도할 수 없는 존엄을 지닌 피조물로서 우리의 형제자매와 관계를 맺으며 존재합니다. 우리는 그들에 대한 책임을 지고 또한 그들과 연대하여 활동합니다. 이러한 관계가 없다면 우리는 덜 인간적인 존재가 될 것입니다. 바로 그래서 무관심은 인류 가족에게 위협이 됩니다. 저는 모든 이가 새해를 맞이하면서 이 현실을 인식하여 무관심을 극복하고 평화를 이룩하기를 바랍니다.

     

     

    무관심의 종류

     

    3. 분명히, 다른 이를 배려하지 않으려고 마음을 닫아버리는 이, 주변을 둘러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는 이, 또는 타인의 문제에 영향을 받지 않으려고 회피하는 이가 지닌 무관심의 태도는 상당히 널리 퍼져 있고 모든 역사적 단계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무관심은 개인의 차원을 확실히 넘어선 세계적인 차원의 것이 되어 ‘무관심의 세계화’를 야기하였습니다.

     

    인간 사회 안의 무관심의 첫째 형태는 하느님에 대한 무관심으로, 여기에서 이웃과 피조물에 대한 무관심도 파생됩니다. 그리고 자기 이웃에 대한 무관심은 여러 가지 모습을 지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라디오를 듣고 신문을 읽거나 텔레비전을 보면서 정보를 잘 얻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의 중독이나 된 듯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인간을 괴롭히는 비극에 대하여 막연한 생각만을 지니며 그것이 자신과 무관하다고 여겨 아무런 연민도 느끼지 못합니다. 이는 사정을 알면서도 시선과 생각과 행동을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시키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우리가 연대의 정신으로 의식을 개방하지 않으면, 바로 우리 시대의 특징인 정보의 증가가 문제에 대한 관심의 증가를 의미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유감스럽게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다른 경우에 무관심은 주변 현실, 특히 가장 멀리 떨어진 현실에 대한 관심 부족으로 드러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묻지도 않고 알려고 하지도 않으며 편안하고 안락하게 살면서 고통 받는 이들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내가 비교적 잘 지내고 편안하면, 잘 지내지 못하는 이들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계화된 무관심에 위협당하는 평화

     

    4. 하느님에 대한 무관심의 소산인 이웃에 대한 무관심은 개인과 공동체의 차원에서 무기력과 냉담으로 나타납니다. 무관심과 그에 따른 냉담은 모든 인간의 공동선 촉진을 위한, 특히 인류의 가장 소중한 보화에 속하는 평화를 위한 각자의 사회적 능력과 역할에 걸맞은 책임의 심각한 결여를 야기합니다.

     

    그래서 제도적 차원의 무관심, 곧 이웃과 그의 존엄과 기본권과 자유에 대한 무관심이 나타나고 이윤 추구와 쾌락의 문화와 결합되면 궁극적으로 평화를 위협하는 행위와 정치 계획을 조장하고 더 나아가, 때로는 정당화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음식, 물, 의료 혜택이나 노동과 같은 자신의 기본권이 거부당하면 이를 폭력을 통해서 확보하려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더 나아가 남벌, 오염, 자연 재해를 촉발하고 전체 공동체를 삶의 터전에서 몰아내어 불안정과 불안을 강요하는, 자연 환경에 대한 무관심은 새로운 형태의 빈곤과 새로운 불의의 상황을 야기하여 흔히 안전과 사회적 평화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무관심에서 자비로 나아가는 회심

     

    5. 1년 전에 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형제자매입니다’를 주제로 한 2015년 제48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에서 성경에 처음 나오는 카인과 아벨의 인간적 형제 관계에 관한 비유를 언급하였습니다(창세 4,1-16 참조). 여기에서 저는 최초의 형제 관계가 어떻게 손상되었는지에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하였습니다. 형제 살해는 배신의 형태를 띠게 되고 카인은 아벨을 형제로 인정하기를 거부하여 형제애, 연대, 상호 존중의 가족 관계에 최초의 균열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개입하셔서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여 주십니다. 카인은 자신의 아우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모른다고 하며 자신이 자기 아우를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아우의 생명과 운명에 대한 책임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는 자신이 관련된다고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출신이 같아서 서로 결부되어 있었는데도 그는 자기 아우에게 무관심합니다.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이 무슨 형제적, 가족적, 인간적 비극입니까! 이는 형제 사이의 무관심을 최초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하느님께서는 무관심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처음부터 당신을 인간의 운명에 관심이 있는 분으로 인간에게 드러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보시고, 들으시고, 아시고, 내려오시고, 해방시키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무관심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주의를 기울이시고 활동하십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인간 가운데 내려오셔서 육신을 취하시고 무엇보다도 죄를 제외한 모든 면에서 인간과 연대를 이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지시하시는 것에 만족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돌보셨습니다. 특히 인간들이 굶주리거나(마르 6,34-44 참조) 할 일이 없을 때(마태 20,3 참조) 더욱 그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인간에게만 머물지 않고 모든 피조물을 끌어안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만지시고, 인간과 말씀을 나누시고, 인간을 위하여 활동하시고, 곤궁한 이들에게 선행을 베푸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 슬픔, 비참, 죽음을 끝내기 위하여 활동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와 같이 우리도 자비로워지라고 가르치십니다(루카 6,36 참조). 특히 당신 제자들에게 이 세상의 고통 앞에서 걸음을 멈추는 법을 배우라고 요청하십니다. 할 일이 많아 바쁘더라도 자신이 지닌 수단을 동원하여 타인의 상처를 돌보기 위하여 걸음을 멈추라고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무관심은 늘 핑계거리를 찾습니다.

     

    자비는 하느님의 심장입니다. 그래서 자비는 하느님 자녀로 이루어진 커다란 가정의 지체인 이들의 심장이어야 합니다. 이 심장은 피조물에 반영된 하느님의 모습인 인간 존엄이 위협받는 모든 곳에서 힘차게 고동칩니다. 다른 이들, 곧 이방인들, 병든 이들, 갇힌 이들, 노숙자들, 심지어 원수들에 대한 사랑이 우리의 행위에 대한 하느님 심판의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있는 곳 어디에서나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가 드러나야 합니다. 우리 본당과 공동체, 단체와 운동, 곧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곳에서는 누구든지 자비의 안식처를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사랑과 연민과 자비와 연대로 참다운 인생의 계획, 상호 관계의 행동 양식을 수립할 것을 요청받습니다. 여기에는 회심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돌로 된 우리 마음을 살로 된 마음으로 바꾸어주도록 해야 합니다(에제 36,26 참조). 이 마음은 참다운 연대를 통하여 다른 이들에게 자신을 열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마음은 “가깝든 멀든 그 많은 인간들이 겪는 불행을 보고 막연한 동정심 내지 피상적인 근심을 느끼는 무엇” 이상의 것입니다. 연대는 “공동선에 투신하겠다는 강력하고 항속적인 결의입니다. 우리가 서로 모두에게 책임이 있는 만큼, 만인의 선익과 각 개인의 선익에 투신함”을 뜻합니다. 연민은 형제애에서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해된 연대는 우리 시대의 고통과 부인할 수 없는 상호 의존을 인식하는 데에 가장 적합한 도덕적 사회적 태도가 됩니다.

     

     

    무관심의 극복을 위한 연대와 자비의 문화 촉진

     

    6. 도덕적 선이며 사회적 태도인 연대는 개인적 회개의 열매로 교육과 양성을 책임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헌신이 필요합니다.

     

    저는 근본적 책임이 있는 가정을 먼저 생각합니다. 가정은 사랑과 형제애, 공동생활과 나눔,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의 가치를 배우고 전달하는 첫째 자리입니다.

     

    학교나 여러 아동 기관과 청소년 기관에서 교육이라는 어려운 임무를 수행하는 교사와 지도자들은 자신의 책임이 인간의 도덕적, 영적, 사회적 차원에 관련된다는 것을 깨닫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자유, 상호 존중, 연대의 가치는 어린 시절부터 전달될 수 있습니다. “모든 교육 현장은 초월자와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을 여는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바로 대화와 결속과 경청의 자리가 되고, 거기에서 젊은이들은 개인의 능력과 내적 부요를 인정받고 형제자매들을 존중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더욱 인간답고 형제애 넘치는 사회 건설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데에서 오는 기쁨을 배우게 되기를 바랍니다.”

     

    문화계 종사자들과 사회 커뮤니케이션 매체도 교육과 양성의 책임이 있습니다. 그들의 과제는 무엇보다도 특정 이익을 따르지 않고 진리에 봉사하는 것입니다. 사실 커뮤니케이션 매체는 “정보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대중의 사고를 형성해 가는 특별한 역할을 하기에 커뮤니케이션은 인격 형성에 좋든 나쁘든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연대와 자비와 연민의 문화의 열매인 평화

     

    7. 무관심의 세계화의 위협을 인식하면서도 우리는, 위에 언급된 상황에서 인간이 실천할 수 있는 연민과 자비와 연대를 증언하는 많은 긍정적인 노력과 활동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모든 이가 이웃을 외면하지 않으려고 결심할 때 어떻게 무관심을 극복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몇 가지 바람직한 사례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교회 안팎으로는 수많은 비정부 기구와 자선 단체들이 있습니다. 그 구성원들은 유행병, 재난, 무장 분쟁 가운데에서도 부상자와 병자들을 돌보고 죽은 이들을 묻어주기 위하여 어려움과 위험을 무릅쓰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의 양심에 호소하는 어려운 상황들을 대중에게 알리는 언론인과 사진기자, 그리고 소수 민족과 종교적 소수자, 토착민, 여성과 아동, 가장 취약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권 수호에 헌신하는 이들을 생각합니다. 이들 가운데에는 위험과 어려움, 특히 무장 분쟁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을 곁에서 돌보는 착한 목자들인 사제들과 선교사들도 있습니다.

     

    또한 얼마나 많은 가정들이 직장과 사회의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시류를 거스르는’ 연대와 동정과 형제애의 가치를 자녀들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구체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까! 저의 호소에 기꺼이 호응하여 난민 가정들을 받아들인 개인, 가정, 본당, 수도회, 수도원, 순례지들에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끝으로 저는 연대를 위한 계획을 실천하고자 협력하는 젊은이들, 그리고 자기 도시와 나라, 세상의 다른 지역에서 곤경에 빠진 이웃들을 돕고자 손을 내미는 모든 이를 언급하고 싶습니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흡족해질 것입니다. 자비로운 사람들은 자비를 입을 것입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입니다(마태 5,6-9 참조).

     

     

    자비의 희년 표징 안의 평화

     

    8. 자비의 희년의 정신으로 우리 모두는 우리의 삶 안에서 무관심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깨닫고 우리의 가정, 이웃, 일터를 시작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개선하는 데에 실질적인 노력을 기울이라는 부름을 받습니다.

     

    또한 국가들도 구체적인 실천을 하라는 부름을 받습니다. 죄수, 이민, 실업자, 병자와 같은 사회의 가장 취약한 이들에 대하여 용기 있는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금된 이들과 관련하여, 많은 경우에 그들을 위하여 교도소 생활 조건의 개선을 위한 구체적인 대책 마련이 시급해 보입니다.

     

    이민과 관련하여, 저는 이민법을 재고할 것을 권유하고 싶습니다.

     

    또한 이 희년에 저는 국가 지도자들이 직업과 땅과 집이 없어 고통 받는 우리 형제자매들을 돕는 구체적인 조치를 취할 것을 호소합니다. 직업이 없으면 자존감이 심각한 타격을 받고 희망이 사라집니다. 유감스럽게도 여전히 직장에서 차별받는 여성들과, 불안정하고 위험한 근로 조건에 처하고 그 사회적 활동의 중요성에 상응하지 않은 임금을 받는 분야의 노동자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필요합니다.

     

    끝으로 저는 모든 이가 의료 혜택과 생명에 필수적인 의약과 가정 치료의 혜택을 누리도록 하여 병자들의 생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효율적인 대책을 마련할 것을 촉구합니다.

     

    또한 국가 지도자들은 국경 너머로 시야를 넓혀 다른 민족들과의 관계를 쇄신하여, 모든 이가 국제 공동체의 삶에 실질적으로 참여하고 포함되어 민족들로 이루어진 가정 안에서도 형제애가 실현되도록 하라는 부름을 받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저는 모든 이에게 다음 세 가지를 당부하고 싶습니다. 물질적 문화적 재화와 사회적 성취만이 아니라, 장기적으로는 정신적 영적 완전성도 파괴하는 분쟁이나 전쟁에 다른 민족들을 끌어들이지 마십시오. 가장 가난한 국가의 국제 부채를 탕감해 주거나 지속가능한 차원에서 관리하십시오. 특정 이념의 지배에 굴하지 말고, 지역 민족들의 가치를 존중하며, 태어나지 않은 생명의 근본적이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그 어떤 경우에도 침해하지 않는 협력 정책을 실행하십시오.

     

    새해 인사와 더불어 저는 이러한 성찰을, 인류의 어려움을 돌보시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전구에 맡겨드리며, 평화의 임금이신 당신의 아드님 예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형제애와 연대를 이루는 세상을 위하여 나날이 노력하는 우리에게 강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바티칸에서

    2015년 12월 8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자비의 특별 희년 개막일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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