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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omilia 2019-08]<기획강론: 감정노동과 우리 사회 1> “노동의 가치를 회복하기 위하여”
    • 등록일 2019-06-15
    • 작성자 관리자
    • 조회수 1254
  • <기획강론: 감정노동과 우리 사회 1>

    노동의 가치를 회복하기 위하여

     

    2019.6.16. 삼위일체 대축일

    이주형 요한 신부(천주교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

     

    손님은 왕이다.” 스위스의 호텔리어이자 기업인인 세자르 리츠(César Ritz)가 한 말입니다. 이 말처럼 장사를 하기 위해선 손님에게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무엇을 팔건 간에 친절과 미소, 웃음과 서비스는 영업의 기본입니다. 가격을 깎고 조금 더 서비스를 얻고자 하는 마음은 소비자들의 희망사항이고 물건을 많이 파는 것은 사업자의 희망사항이니 좋은 서비스는 경제생활의 좋은 매개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최선을 다해 일을 해도 성과가 약하고 노동 환경 자체가 열악하기 때문입니다. 일단 그것을 한국의 노동시장 분절 구조고용악화 현상때문입니다.

     

    한국의 노동시장 분절 구조는 매우 유명합니다. 고용시장이 두 개의 시장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이 표현은 급여와 복지, 근속 기한이 안정적인 ‘1차 시장’, 고용환경과 복지가 열악한 ‘2차 시장을 의미합니다. 이 두 시장의 격차는 매우 심합니다. 2천만 명에 이르는 국내 임금노동자의 약 75%인 가 2차 시장에 속해있습니다. 자영업은 사정이 좋을까요? 전체 약 680만 명 정도의 자영업자 중 약 630만 명은 영세 사업장에 속합니다. 월수입 4천만 원 이하, 그러니까 벌어봐야 매번 적자를 보는 동네 편의점과 구멍가게 사장님들이 여기에 속하겠지요. 쉽게 정리해서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 10명 중 1-2명 정도는 괜찮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지만 나머지는 그 반대의 상황이라 보시면 됩니다. 국민소득 3만 불 시대인데 왜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지 물어보실 수 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국민 평균소득입니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소득불평등이 심한 나라이니 평균소득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럼 왜 이런 노동시장 이중구조가 형성되고 고착화된 것일까요? 복잡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한국이 수십 년간 대기업 위주의 경제발전을 도모해왔다는 점입니다. 수십 년간 형성된 일부 대기업과 나머지 대다수 중소기업의 격차가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동네의 구멍가게와 전통시장이 대형마트와 대기업의 프랜차이즈 때문에 생계를 위협받는다고 하잖아요? 당연하죠. 아마추어 복서가 복싱 챔피언과 권투 시합을 공정하게 할 수 없는 것처럼, 대기업과 구멍가게는 경쟁에서 애초에 상대가 될 수 없겠지요. 1997년 파견법 시행도 큰 원인입니다. 고용 유연화를 통해 기업의 경제활동을 지원하려던 파견법 본래의 목적이 왜곡되어 오히려 불법하청, 사내하청, 다단계 하청, 계약직 노동자를 많이 만들어냈고 지금은 직접고용을 회피하기 위해 악용되어 전체 임금노동자의 32.8(20168월 통계청 자료)644만 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를 양산했습니다. 고용시장 자체가 경쟁력이 떨어지고 차별받는 사회적 취약계층에겐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었습니다.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이러한 현상이 앞으로도 계속되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요? 바로 좋은 일자리를 포함한 모든 일자리의 감소입니다. 더욱이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의 확산, 글로벌 경쟁의 가속화, 한국 경제의 불황이라는 대외적 차원도 부정적인 전망을 하게 합니다. 또한 낙수효과 이론’(trickle down effect)의 실패가 거의 기정사실화 되고 있는 현시점에서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은 매우 치명적인 결과입니다. 게다가 일을 해도 가난한 근로빈곤과 고령화로 인한 노인빈곤이 심각하게 우려됩니다. 점점 더 우리 사회 대부분의 사람들이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내몰릴 것입니다. 사회와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도 이러한 현실은 직접적인 현안이고 생활의 문제입니다. 많은 청소년, 청년들이 구직활동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대부분의 신자들이 일터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고 연세 많으신 어르신들이 생활고에 시달리는 현상이 본당 공동체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물어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우리는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까?

     

    이런 현실적인 어려움, 고용환경의 악화, 국가 경제지표의 하락, 근로빈곤의 확산이 개선되려면 노사정(노동자, 사용자, 정부) 차원의 대화와 협력, 상생의 노력이 절실할 것입니다. 또한 지금의 상황을 냉정히 분석하여 미래를 준비하고 차근차근 현실적 대안을 마련해야겠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사회적 약자를 배려해야 합니다. 열악한 고용환경 속에서 더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는 미숙련, 저학력, 청소년과 청년, 노인과 여성 등 우리의 많은 이웃을 배려해야 합니다.

     

    그리고 조심스럽지만 강하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 사회가 윤리, 도덕, 신앙과 같은 정신적인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제적 여건이 우리의 삶을 지배할 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의 정신과 영혼, 품위와 인격은 지배할 수 없습니다. 기실 현대 사회의 문제는 모든 현상을 경제적 가치로 보려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경계라 하고 하신 물신(物神)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노동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동의 정신과 가치가 물질적으로만 평가되고 있습니다. 1억에 가까운 연봉을 받는 노동자가 파업할 때 우리 사회는 어떻게 이해합니까? “배가 불러서 못된 파업만 하는구나!” 하고 비난합니다. 하지만 외국은 수백억을 받는 스포츠 스타도 노동조합에 가입하여 파업을 하기도 합니다. 돈 때문이 아니라 노동자의 권리와 존엄과 같은 노동의 정신적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노동조합은 가톨릭 교회에서 인정하는 것이며 응당 존재해야 합니다(간추린 사회교리 305). 그렇다면 현재 한국의 많은 노동조합은 어떻습니까? 10%에 불과한 소수의 조직이지만 한국도 노동조합의 활동이 활발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익집단인 노동조합이 사회적 약자나 자신보다 처우가 어려운 회사의 동료를 돌보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산업분야별 노조보다 기업노조 중심으로 조직된 한국에서 많은 경우 노동조합은 자신들의 기득권과 이익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노동조합 본연의 정신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자신들의 이익만을 챙기는 조직이 이웃과 사회에 무슨 기여를 한다는 말입니까?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회칙 진리 안의 사랑에서 노동조합의 역할은 좁은 의미의 기득권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와 형제애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경제, 사회, 정치적 발전이 참으로 인간다운 것이 되려면 형제애의 표현으로서 무상성의 원칙이라는 여지를 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34).

     

    가톨릭 교회가 가르치는 노동은 영성적이고 신앙적인 가치입니다. 현실의 삶과 어려움도 중요하지만 신앙과 영성적 가치가 없다면 이 사회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가치와 정신이 상실된 사회에서 물신(物神)은 우리의 삶을 더 황폐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국내의 노동환경만 보더라도 일부 원청 기업과 경영인들의 갑질과 전횡, 직원을 소모품으로 대하는 조직문화, 자신의 권리만 중요하다는 잘못된 소비자 의식, 나만 편하면 된다는 저급한 이기주의 등이 공동체와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을 인격체로 대하지 않기에 사람은 시장에서 소모품으로 인식되며 감정노동이라는 병폐로 많은 이들이 신음합니다. 기본적인 예의와 이해, 배려와 소통만 있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개탄스러운 현실입니까? 욕심과 이기심만 판치는 사회에서 국민소득이 3만 불이 무슨 소용입니까?

    사회와 경제 분야의 불평등과 불의함을 개선하는 하려 할 때 동시에 우리가 잊었던 정신적 가치를 회복을 동반해야 합니다. 도덕적, 윤리적, 신앙적 가르침이 결여된 모든 움직임은 결국 또 다른 갈등과 분쟁을 야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꾸로 그러한 정신적 가치가 잘 회복된다면 사회문제의 많은 첨예한 것들이 순리대로 풀려나갈 것입니다. 결국 관건은 우리의 욕심과 욕망을 어떻게 재조정하느냐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오늘을 삼위일체 대축일로 지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을 한분이신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날입니다. 삼위일체란 삼신론이 아니라 한분이신 주님을 고백하는 것이며 성부, 성자, 성령이 본질로는 같은 주님이시나 위격은 다르다는 철학적 존재론과 양태를 함의하기에 이성적으로 온전히 이해하긴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삼위일체를 통해 우리가 깊이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바로 겸손입니다. 구원의 역사를 살펴보건대 성부께서 성자를 보내신 것은 인간과 세상을 구하기 위함이고(요한 3,16) 성자는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며 성부께 순명했기 때문입니다(필리피 2,8) 그리고 성자는 성부께 겸손한 마음으로 순명했고 성부는 성자를 죽음에서 일으키시어 인류에게 하늘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선취하시고 인간에게 희망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자주 접하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많이 나오는 주제가 바로 가족애혹은 갈등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여러 가지 사건과 영화의 소제들이 많지만 그 안에서 다루어지는 것은 정신적 가치들, 사랑, 희망, 믿음, 용서, 화해 이런 것들이지요. 대개 그러한 가치들은 큰 시련과 역경을 함께 이겨내는 가운데 얻어지지만 결국은 당사자들이 깨달아야 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상대방을 이해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으로 말입니다.

     

    감정노동에 대한 연재를 시작하면서 우리 사회가 무엇보다 서로 배려하고 이해하는 삶의 자세와, 윤리, 도덕, 신앙이라는 정신적 가치를 회복해야 함을 강조드리고 싶습니다. 올해는 김수환 추기경님 선종 10주년인 해입니다.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서로에게 밥이 되어 주십시오.” 라고 하셨던 추기경님의 말씀이 더욱 절실히 우리 사회에 요청되는 오늘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의 말씀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믿음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나는 하느님의 이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 위하고 서로 돕고, 서로 받아주고 서로 나눔으로써

    참으로 그리스도와 같이 사는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신앙과 사랑 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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