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시는길
  • 후원안내
  • 문의하기
노동이슈

판단

  • home
  • 노동이슈
  • 판단

  • [야곱의 우물] '비정규직' 바라보기
    • 등록일 2015-02-27
    • 작성자 관리자
    • 조회수 2104
  • 야곱의 우물 3월호  - 교회와 사회

     

    ‘비정규직’ 바라보기 

     

    비정규직,

    정규직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많은 갈등을 일으키는 ‘비정규직’이란 단어는 명칭에서부터 자신의 온전한 개념을 스스로 나타내지 못한다. ‘내가 OO다.’라고 당당하게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OO가 아니다.’라는 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 정규직과 달리 안정된 정년을 보장 받지 못하며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낮은 임금체계와 보다 덜한 사내 복지 규정을 적용받으면서 자신을 소개할 때도 스스로 이름조차 갖지 못하는 제도가 바로 ‘비정규직’이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하면서도 누구보다 못한 계약 관계에 놓여있다는 것, 게다가 이것이 합법적 제도로 묵인되는 것이 속상하고 억울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비정규직은 표현에서부터 참 슬픈 단어다.

    얼마 전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한 자매를 만난 적이 있다. 사회교리를 주제로 강의하는 자리였는데, 우리 사회 노동문제에서 복음적이지 못한 모습을 찾아 나누는 시간이었다. 강의를 마무리하며 각자의 소감과 질문 등을 이야기하는 순서가 있었다. 그때 한 중년 여성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그 자매님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저는 지금 비정규직인데요….”라는 한마디를 내뱉고는 다음 말을 잊지 못했다. 왈칵 터진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며 자신도 당황하고 지켜보는 사람들도 얼음으로 만들어버렸다.

    누구하나 나서서 위로를 건네지도 못했고, 마이크를 넘겨받아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지도 못하는 참으로 어정쩡한 상황이었다. 그 자매가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이해’까지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참의 침묵 후에 자매님은 자신이 요즘 들어 너무 작아 보인다는 고백을 했다. 자신이 무얼 잘못한 것은 분명 아닌데, 합법적 차별을 받는 것이 속상했고, 어디를 가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주눅이 든다고 이야기했다.

    질문을 받는 나도 짧은 시간 안에 여러 생각이 스쳐갔다. 무어라 위로해야 할까…. 교회가 가르치는 참된 노동의 가치를 설명할까…. 잠깐 망설이다가, 인간이 노동을 하는 이유는 하느님을 닮았기에 그러하다는 이야기와 함께, 그렇기 때문에 노동에는 정당한 고용구조와 임금체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로 마무리했다. 과연 내 이야기가 그분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비정규직’ 개인의 문제로 볼 것인가?

    이미 우리 사회의 임금 노동자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비율이 간접고용과 기간제 일자리에서 근무하는 비정규직이다. 정규직과의 차이는 점점 벌어지고 있고, 이러한 차이는 사회 양극화를 가속시켜 저소득 계층은 점점 증가하고 사회 계층간 이동은 더 어려워지는 심각한 불균형의 경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는 단순히 이러한 차별이 고용형태나 임금 수준에만 머물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바로 비정규직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며, 정규직이 아니면 능력이 없거나 무언가 스스로 잘못된 인생을 살아온 사람쯤으로 여기는 사회 분위기다.

    비정규직 노동자 스스로도 자신이 존엄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또 다른 사람들도 이러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물론 이러한 시선이 합리적이고 의식적인 행동이 아니란 것을 알지만, 사회 구조가 무의식적인 차별을 당연하게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비정규직을 그 개인의 책임으로 생각하며 스펙이 낮거나 아니면 교육활동을 열심히 하지 않은 개인의 문제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비정규직 문제는 결코 개인의 책임이 아니다. 노동은 다양한 가치와 의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시대는 그 안에서 경제적 효율성만을 내세우기에, 사람도 필요할 때 쓰고, 필요 없을 때 버리면 그만이라는 욕심이 극대화 되었고 이 욕심에서 확대되어 나온 제도가 바로 비정규직이다. 생산성 향상이라는 경제적 가치만이 인류에게 가장 중요하고 소중하다는 입장에서 노동의 참된 의미를 잃어버렸다. 이 때문에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아무도 손대지 못하고 점점 그 힘을 키워간 제도가 바로 비정규직인 것이다.

     

    ‘비정규직’ 참으로 비정한 규칙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고, 하느님 창조사업에 동참한다는 노동 본래의 가치는 교과서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되고 말았다. 경쟁은 점점 치열해졌고, 여기서 살아남은 소수는 양질의 일자리를 얻을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다수는 비정규직이 되어 패배감과 자괴감 안에서 스스로의 존엄함을 기억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정규직 제도는 특수한 상황에서만 사용할 수 있도록 보다 엄격한 제도로 축소해야 한다. 비정규직과 정규직 사이에 차별이 발생하니, 양질의 일자리인 정규직을 줄여 차이를 해소한다는 것은 합리적 방법이 되지 못한다. 그럴 것이 아니라 비정규직을 고용할 수 있는 자격요건과 사용 기한을 한정시켜 비정규직이 차지하는 비율을 점차적으로 낮추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이러한 차별을 줄여 나갈 때 장기적으로 더 높은 경제성장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저소득층의 소득증가로 실질적 구매력이 향상되어 생산과 소비의 선순환이 가능해지고, 심각한 사회문제인 양극화에 따른 불안 요소도 줄어들어 보다 건강한 사회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지난 8월 한국을 방문해 큰 가르침과 울림을 주었던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8월 15일 성모승천 대축일 강론에서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만들어 내고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비인간적인 경제 모델들을 거부하기를 빕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과연 우리 사회에서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만들고 노동자를 소외시키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스도 신앙인이라면 어떤 비인간적인 경제 모델을 거부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의 신앙생활이 성전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떤 경제 제도를 만들어야 하는 것일까?

     

      노동은 바로 인격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므로, 이 노동은 결코 상품으로서만 취급될 수 없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노동이 생계유지의 유일한 소득원이므로, 그 보수는 시장의 관행이 아니라 참으로 정의와 형평의 법칙에서 결정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비록 쌍방이 자유롭게 맺은 노동 계약이라 할지라도 정의에 어긋나는 것이다. 노동이 요구하는 재화의 분배만이 아니라 인간이 재화를 생산하는 그 조건도 정의의 법칙에 부합되어야 한다. 인간 본성의 요구에 따라, 노동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책임을 이행하고 노동을 통해 자기 자신을 완성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경제 체제의 구조와 조직이 노동을 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 존엄성을 위태롭게 만들거나 책임 의식을 약화시키거나 행동의 자유를 박탈한다면, 비록 거기서 막대한 재화가 생산되고 정의와 형평의 규범에 따라 그 분배가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그러한 경제 체제는 정의에 어긋나는 것이다. (교황 요한 23세. [어머니요 스승] 18항. 82-83항)

       

    정수용 (이냐시오) 신부 |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부위원장

     

  • 첨부파일
    j.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