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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간 레지오 마리애] 1월호 떠넘겨지는 ‘위험’
    • 등록일 2017-01-26
    • 작성자 관리자
    • 조회수 1517
  • [201701]복음으로 세상 보기

    떠넘겨지는 ‘위험’

    정수용 이냐시오 신부.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

     

     

    “수용아.. 아버지 출근하신다.”
     “네.. 안녕히 다녀오세요.”


    제가 학생이던 때, 저희 아버지의 출근은 언제나 제 등교 시간보다 조금 빨랐고 저는 하던 일을 멈추고 현관에 나와 아버지를 배웅했습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저의 아침 인사는 언제나 “안녕히 다녀오세요”였습니다. 그렇다고 저희 아버지가 그렇게 위험한 일을 하는 분은 아니었습니다. 평범한 직장의 회사원으로 오래 사셨고, 이후에는 조그만 가게를 운영하실 때도 회사원일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안녕히 다녀오시길 인사했습니다. 여기서 “안녕히 다녀오세요”는 특별히 심각한 위험이 예상되어 염려한다기 보다는 일상의 상투적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정말로 일터로 나가는 길이 걱정되는 이들도 있습니다.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동안 목숨을 걸어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매일 출근하는 곳, 하루에 가장 긴 시간을 보내는 일터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곳이 되는 경우도 많은 것입니다. 그들의 가족은 일터에 나가는 사람이 무사히 돌아오길, 제발 오늘도 아무런 사고 없이 하루가 지나가길 간절히 바랍니다. 왜 우리의 일터는 목숨을 내어 놓아야 하는 곳이 되는 것일까요? 신문과 뉴스에는 산업재해로 사람이 다치고 죽게 되었다는 뉴스가 끊이지 않는 것일까요?

     

    위험 업무를 외주화하는 현장, 점점 더 위험해져
    작년 5월28일 서울의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안타까운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바로 승강장 스크린 도어를 수리하던 열아홉 살 청년이 달려오던 열차에 치여 목숨을 잃은 사고였습니다. 스크린 도어 오작동을 수리하기 위해 현장에 도착한 청년은 열차가 지나가는 공간으로 들어가 작업을 했습니다. 분명 2인 이상이 함께 작업해야 했지만 규정은 지켜질 수 없었습니다. 또한 통제실에 연락해서 달려오던 열차를 멈추고 작업을 진행해야 했지만 하청업체에 속한 그에게는 통제실과 연락을 취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가 안전한 작업을 위해 통제실에 연락해 열차를 멈추기 위해서는 대여섯 단계를 거처야 했습니다. 결국 이런 구조적 문제 안에서 그는 또 홀로 서둘러 작업을 해야 했고, 그날은 달려오는 열차에 사고를 당한 것이었습니다.


    유품으로 남은 그의 가방에는 몇 개의 공구와 함께 컵라면 하나가 발견되었습니다. 너무나 젊은 나이에 끼니도 거르며 일하다 사고를 당한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고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사고가 처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2013년 1월 성수역에서도, 2015년 8월 강남역에서도 유사한 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 역시 구의역 청년처럼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였습니다.


    이보다 앞선 작년 지난해 1월에는 이십대 청년의 실명 사건이 있었습니다. 전자제품에 들어가는 부품을 만드는 회사에 다니던 그는 알루미늄을 자르는 일을 하던 노동자였습니다. 이 과정에는 금속에 열이 발생하는데 이를 식히기 위해 알코올을 뿌려가며 작업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퇴근 후 의식이 혼미해지고 앞이 잘 보이지 않아 병원을 가게 되었고 검사 결과 메틸알코올 중독 증상으로 의심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고 이런 일은 같은 직장에 다니는 다른 이에게도 비슷한 시차를 두고 벌어졌습니다.


    조사 결과 금속 절단 작업에서 발생하는 열기를 식히기 위해 유해성이 상대적으로 적은 에틸알코올을 사용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성이 강한 메틸알코올을 사용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메틸알코올은 주로 공업용으로 사용하며 분해되는 과정에서 포름알데히드라는 독성 물질이 나오는데, 이는 소량에만 노출되어도 신경계 이상을 일으키고 앞선 사례처럼 실명에 이르게 합니다. 메틸알코올은 가격이 에틸알코올에 비해 1/3 정도로 쌉니다. 물론 독성물질을 사용하면서 본인에게 위험성을 알리지도 않았고, 정기적인 검사를 하지도 않았으며, 작업장의 안전설비도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대기업 하청 노동자였던 그들도 일터에서 시력을 완전히 상실하는 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과연 이러한 일은 정말로 특수한 일일까요? 아주 일부의 이야기이고 특별한 상황을 말하는 것은 아닌지 궁금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가 않습니다. 지난 2015년 한 해 동안 산업재해 사망자는 총 1800여 명이나 됩니다. 이 중 질병에 의한 사망이 약 850명 정도이고 사고로 인한 사망은 이보다 좀 더 많은 950명 정도였습니다. 아무튼 일터에서 일하다 죽는 사람이 하루 다섯 명 꼴이나 된다는 것입니다. 언뜻 들으면 감이 잘 안 잡힐 수 있겠지만 선진국에 속하는 스웨덴과 비교하면 그 차이는 명확합니다.


    세계에서 산재 사망재해수가 가장 낮은 스웨덴은 2014년 기준으로 41명을 기록했습니다. 그럼에도 스웨덴 정부는 이 수치를 낮추기 위해 2020년까지 매년 1억 크로나, 우리 돈으로 약 130여억 원을 책정했습니다. 우리 사회가 위험한 업무를 하청, 외주화, 아웃소싱, 용역이라는 이름으로 비정규노동자에게 맡기며 생명보다 비용절감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과 너무나 큰 차이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오늘도 건설업이나 조선업과 같은 위험한 작업장에서 몇 명의 노동자가 사고를 당했고 그로 인해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신고가 되지 않고 숨겨지는 것들을 포함시키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일터에서 가장 소중한 생명을 잃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위험한 업무를 안전하게 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고 감독을 철저하게 하는 길을 택하기 보단 위험 업무를 영세 업체에 맡기고 외부 업체에게 떠넘기고 있습니다. 비용 절감, 생산성 향상이란 이름으로 일터는 점점 더 위험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하는 노동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중요하게 여겨왔습니다. 그에 따라 노동 역시도 단순히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으로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엄성 안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무리 물건을 빨리 만들고 싸게 만들 수 있다 하더라도 그 과정 안에 사람의 생명이 위협받는다면 그러한 생산은 정당하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복음의 기쁨” 53항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계십니다.


    “인간을 사용하다가 그냥 버리는 소모품처럼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버리는’ 문화를 만들어 왔고 지금도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문제가 단순히 착취와 억압 현상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어떤 것입니다. … 배척된 이들은 더 이상 사회의 최하층이나 주변인이나 힘없는 이들이 아니라, 사회 밖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착취된’ 이들이 아니라 쫓겨난 이들, ‘버려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어느 순간 노동자를 착취하는 것을 넘어 사용하고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도 집을 나서며 그들의 가족들에게 “안녕히 다녀오세요.”라는 인사를 들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안전한 일터에서 하루를 마치고 가정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길 바랐을 것입니다. 그 작은 소망은 모두에게 지켜질 수 있어야 하며 그러한 사회를 위해 우리부터 배척의 경제를 극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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