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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동사목 자료] 노동과 자본의 관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8
    • 등록일 2021-05-21
    • 작성자 관리자
    • 조회수 62
  • 자본에 대한 노동의 우선성에 관하여

     

    IV
    이런 맥락에서, ‘자본에 대한(over) 노동의 우선성’ 원리를 좀 더 자세히, 곧 이 원리를 매우 일반적인 용어인 ‘자본과(and) 노동’의 도식적인 구분과 대조함으로써, 좀 더 자세히 검토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이분법의 역사적 기원은 이미 위에서 간략하게 요약하였다. 물론 현재 관계적 구조 내의 이 문구(자본과 노동)는 모호하고 여러 다른 해석들에 개방적이며, 따라서 오해들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적어도 그 같은 분명히 부적절한 용어 사용으로 인해, 구별화 자체가 종종 불신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1982년에 Wihelm Weber는 이미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이제 ‘자본과 노동’ 사이의 고전적인 경제적 이원론이라는 상당히 소중히 여겨졌지만, 그 사이 구식이 되어버린 장난감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구식의 이원론은 인간과 노동 사이의 인간학적 이중성을 위한 것이었으며, 그 안에서 인간의 우선성은 논쟁의 여지가 없었다.” 구별화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은 Niklas Luhmann에 의해 제시되었는데, 그 구별화는 기본적으로 암시적인 구별을 구성하는 것으로서 역사적으로는 적절할 수 있지만, 오늘날 여러 가지 이유로 부적절한 것으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그 구별이 경제 체계들을 기술하는 데 이제 적합하지 않은 개념을 갖고서 점점 대립하는 쪽으로 진화했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그 ‘전투적 의미론’으로 진행된 구별은 그동안 실재들에 관한 모든 뜻을 상실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밝힌다. “세부 사상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모순들이 증가한다. 거의 만날 수 없다. 이런 구별로 평가될 수 있고, 그리고 그 차이 내에서 무게 중심을 옮기거나 중립화를 꾀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 그런 사회 문제들은 거의 없다. 이 전면의 투쟁은 어디서나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그러한 비판적 성찰과 다른 내용을 인식하고 있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본에 대한 노동의 우선성”(「노동하는 인간」, 12항 1)이라는 어구의 고유한 의미를 명심하여야 한다. 게다가 이는 “자본의 도구에 대한 인간의 우위성”(「노동하는 인간」, 13항 4)라는 어구, 혹은 “사물에 대한 인격의 우위성, 그리고 생산 수단의 전체 집합으로서의 자본에 대한 인간 노동의 우위성”(「노동하는 인간」, 13항 5)이라는 확장된 공식화에 적용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처음부터 교황은 개념적 쌍(노동과 자본)이 서로 부적절하게 대립하는 것을 피하려 노력했지만, 매우 구체적으로 이 원리 내에서 도구로서의 자본에 대한 노동하는 인간의 우선성을, 어떤 경우에도 생성되는 영속적 기준으로,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중요한 가치를(자본 위의 노동, labour over capital) 구성하는 이 원리의 침해를 가리키고, 추구하는 가치를 더 잘 달성하기 위한 특정한 구조적 과제들을 공식화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의미 내에서, 특히 개발도상국의 정세와 관련해서 그리고 세계화가 된 세계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원리는 즉 우선적 기준으로서 여전히 유효하다. 그 원리로, 적어도 정당한 경제 체계는 어떻게 성취될 수 있는가에 관해 기존의 체계들은 평가할 수 있다. 비록 그 원리가 사회-윤리적인 측면에 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더라도 –그리고 이것이 경계선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V

    특히, 일반적 특징 그 이상으로 교황에게 너무나 중요한 것은 바로 관련된 사람들이라는 점을 분명히 보아야 한다. 첫눈에 그것은 매우 자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면밀하게 살펴보면, 이 측면은 그 순진함을 놓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위에서 말한 이 진리에 비추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본이 노동에서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게 된다. 절대로 노동이 자본에 대립되거나 자본이 노동에 대립되는 것일 수 없으며,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더구나 이러한 개념의 이면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서로 대립될 수는 없다.”(「노동하는 인간」, 13항 1) 이는 상당한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 교황은 노동하는 인간이 “‘자신을 위해서’ 노동하고 있음을 자각할 수 있는”(「노동하는 인간」, 15항, 2) 방식으로 생산 과정이 조직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왜냐하면, 지나친 관료적 중앙 집권체제 안에서 개별 노동자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자신이 주도권을 지닌 노동의 참된 주체라기보다는 하나의 단순한 생산 수단”(15항, 2)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각 사람은 자신의 노동에 기반하여 “다른 모든 사람과 함께 노동하는 커다란 일터에서 자신도 하나의 소유자라고 온전히 생각할”(14항, 7) 수 있어야 한다. 기업 내 사람들의 통합은 언제나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이유 때문이다. 그에 따라서 교회의 사회 교리는 이 기업은 그 안에서 노동하는 모든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노동의 인간-지향 구조 또한 이 개념 내부에서 참여와 파트너십의 순위 메김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노동과 자본 소유를 최대한 결합하고 자본의 익명성을 줄이려 할 때, 자본과 노동 사이의 대립을 어떻게든 완화하거나 극복하는 데에는 두 가지 행동 경로가 있을 것이다.

     

    첫째, 중요한 것은 조합과 경영 사이의 진정한 협력이다. 그들의 의무는 그 구성원들의 복리에 헌신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타인에 대한’ 투쟁이나 ‘집단 혹은 계급적 이기주의’에 휩쓸려서는 안 된다. 오히려 노동 시장 당사자들 사이의 투쟁은 “사회정의의 선을 지향하려는 것이지, 반대자를 제거하려는 ‘투쟁’이어서는 안 된다.”(「노동하는 인간」, 20항, 3) 공동-결정, 이익-공유 그리고 참여의 다른 방법들이 반드시 이 결합(협력)으로 다루어져야 하는데, 이 자리에서는 그것들을 자세히 다룰 수도 없거니와 그렇게 하지도 못한다.(「사십주년」, 65항; 「어머니요 스승」, 91-92항, 「사목헌장」, 68항, 「노동하는 인간」, 13-15항 참조)

     

    따라서 자본과 노동 사이의 대립을 극복하기 위한 둘째 행동 경로는 밝혀졌는데, 다시 말해 국가 경제적 자본 형성에 노동자들의 참여가 그것인데, 이는 19세기 이후 계속해서 가톨릭교회의 사회 교리가 기울인 오래된 관심이다. 그리고 어느 시대에나 그 관심은 인간 노동의 주체적 성격을 회복하거나 보호하는 것에 관련되어 있다.(「노동하는 인간」, 18항 4참조)

  • 링크
    http://www.nodongsam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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