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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월호 생각의자] 참된 부끄러움
    • 등록일 2023-04-26
    • 작성자 관리자
    • 조회수 260

  • 참된 부끄러움



    ‘생각의자’ 원고를 부탁받았다.
    앞선 의자의 수를 세어보니 서른다섯 번째더라.
    뭐, 횟수야 그렇다 치더라도 무엇보다 부담스러운 것은 제목부터가 ‘생각 의자’다!
    ‘생각’이 앉아있는 의자여야 하는데, 
    별생각 없이 넙죽 받아들였나 보다.
    인제 와서야 아뿔싸 싶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일단 뜻대로 움직여 주는 몸부터라도 의자에 앉혀 놓고선
    희미해진 기억 속 짧은 사고의 파편들을 모아 맞춰본다.

    몇 년 전이었는지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고,
    내가 아이들과 놀아준 것인지 아이들이 나와 놀아준 것인지,
    그 구별조차도 매우 희미했던 거 같긴 한데, 
    아무튼 성당 마당에서 아이들과 같이 뛰어놀다가 
    잠시 화단에 걸터앉아 있었을 때였다.
    유치부의 한 아이가 내게 오더니,
    이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하였다.
    “신부님, 친구 누구는요, 뭐를 좋아하는데요, 저는 뭐가 좋고요,
     …  그리고요, 유치원에서 뭐를 했는데요~, ….”


    지금은 훌쩍 커버렸을 그 아이가 이 글을 볼 턱도 없고, 
    또 본다 해도 자신의 이야기인지는 모를 것이기에 솔직 하자면,
    흥미진진하다거나 궁금함을 자아내는 그런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큰 부담 없이 있는 그대로를 편안히 들을 수 있는, 
    아이의 소소한 일상 이야기는 은근한 즐거움을 주는 나눔이었다. 
    그렇게 가볍게 산책하듯 아이의 세상을 듣고 있었는데,
    무슨 비밀을 들려주려는지 잠시 머뭇거리다 바짝 다가와선 귓속말로 이어가길,
    “그런데요, 친구 누구는 어느 아파트에 살고요, 또 누구는요, 집이 큰데요,
    우리 집은요, 쪼그매서요, 방이 한 개예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화단에 사뿐히 걸터앉은 채 
    아이의 재잘거림을 따라 가벼이 산책하듯 즐거이 듣고 있었는데,
    그 가볍고도 기꺼운 발걸음을 덜컥 멈춰 서게 만드는 귓속말이었다. 
    어디를 향해 발을 내디뎌야 할지, 난감한 길목에 와버린 기분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는 것은 그 아이는 내게 귓속말하느라,
    곤혹스러움이 다소 드러났을 나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는 것이겠다. 
    대강이나마 적절한 추임새조차 찾지를 못하고 있는 내게,
    아이는 마저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래서요, 잠도 엄마랑 아빠랑 같이 잘 수 있어서 좋아요.”
    자신의 세상을 들려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울 따름이었는데 더더욱 고맙게도 
    아이는 어찌할 바 모르는 나에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선물을 들려주었고, 
    아직 채 못다 들려준 자신의 이야기를 마저 따라 걸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수년 전 아이가 건네주었던 그 선물을
    지금 4월의 ‘생각 의자’에 앉아 다시금 꺼내 보고 있자니,
    그 아이의 속삭이던 목소리가 잔향이 되어 이런저런 생각들을 불러일으킨다.
    머뭇거리다가 귓속말로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어준 아이의 마음에
    나는 왜 덜컥 멈추어 곤혹스러움을 느끼게 되었던 것일까?
    아이가 자신의 작은 집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있음을 내가 느껴서였을까,
    아니면 나부터가 작은 집을 부끄러울 만한 것으로 여기고 있어서였을까.
    우리는 그간 무엇을 피부에 가장 먼저 와닿는 부끄러움으로 여겨왔는지 생각해 본다.

    달동네, 반지하, 임대주택, 다 닳아 떨어진 운동화, 구멍 난 양말, 땀투성이의 작업복, 
    물질적 궁핍함이 묻어나는 거주지, 차림새, 직업 등은 우리에게 부끄러운 것이곤 했다.
    마음대로 가누지를 못하는 몸, 또렷하게 발음되지 않는 말, 좀 더 제한된 인지력,
    장애라는 이름의 신체적‧지적인 다름 또한 부끄러운 것으로 여겨지곤 했다.
    애환이 진하게 배어나는 우리네 삶은 그 자체로 가난을 상징하는 것이 되었고,
    어째서인지 영문도 모른 채 부끄러움의 대상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이 부끄러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도대체가 무엇이 우리에게 부끄러움일 수 있겠는가?
    새삼 생각건대 우리가 참으로 부끄러움이라고 해야 할 것은 저 가난이 아니겠다.


    작은 집, 허름한 옷, 짧은 가방끈, 신체적 어려움, 고달픈 노동, 변변치 않은 소득,
    우리에게 부끄러움이 되어야 할 것은 이와 같은 것들이 아니라,
    가난이라는 단어로 대변되는 삶을 한낱 부끄러움으로 여기게 하는 ‘그 무엇’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무엇’에 대해 또한 끊임없이 사고하며 성찰해 나가야 하겠다.
    정말이지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무엇이 참으로 우리의 부끄러움인지를 잃어버린 채,
    한없이 부끄러운 삶만을 살다가 부지불식간에 하느님의 공의를 만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지금 나의 삶은 무엇을 부끄러움으로 여기며, 또 무엇을 행복으로 여기고 있는 것일까.
    한 아이의 속삭임이 이끌어 준, 생각의 의자에서 거듭 부끄러이 자신을 성찰하여 본다.

    “많은 노동자가 하수도를 청소하는 것이 더는 부끄러움이 아니고,
    다만 우리의 그 벗들이 쓰레기와 오물을 치우도록 하수도를 채우는 것이 부끄러움이겠다.
    또 흔하디흔한 신발을 신고 손님으로 가는 것이 부끄러움이 아니고,
    자기 구두를 보호하느라 구두 위에 방수용 장화까지 겹쳐 신고
    (신발을 두 켤레나 신고) 맨발인 사람들을 지나쳐 가는 것이 부끄러움이겠다.
    프랑스어나 새로운 소설을 모르는 것이 부끄러움이 아니고,
    자신들의 빵이 어떠한 수고를 거쳐 준비되는지도 모르고 빵을 먹는 것이 부끄러움이겠다. 


    … (노동의 흔적인) 더러운 손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부끄러움이 아니고, 양손에 (노동의) 굳은살이 없는 것이 부끄러움이겠다.” 1)

    1) 톨스토이의 “What Shall We Do?” 중 일부


    천주교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부위원장 김비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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