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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월호 그의 신발을 신고] 할머니와 환희의 신비
    • 등록일 2021-08-23
    • 작성자 관리자
    • 조회수 837
  • 할머니와 환희의 신비

     

    <출처: 보건복지부>


    얼마 전 외할머니의 4주기였다. 할머니는 한반도 서남쪽 끝자락 섬 ‘진도’에서 평생을 농부로 사셨다. 할머니의 삶을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 엄마와 가끔 술잔을 기울일 때 들려주시는 할머니 얘기가 나에게는 마치 “옛날이야기” 같았다. 부분적으로나마 알게 된 할머니의 삶은 한(恨) 그 자체였다.

     

    할머니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였다. 일제강점기가 지나간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아비를 잃은 소녀가 학교에 가는 것은 여의치 않았으리라. 결국 글을 완전히 배우지 못한 할머니는 문맹이 되었다. 글을 배울 기회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학교에 가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야학이 있었지만, 야학에 가는 날이면 과부가 된 어머니를 노리는 동네 남자들의 겁탈 시도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에 배움을 향한 어린 소녀의 열정은 꺾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시절이었다.

     

    <출처: Photo by Artem Kovalev on Unsplash>

     

    남동생 둘을 한국전쟁 때 총탄으로 잃고, 언니는 한센병 환자로 몰려 - 한센병 여부도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 소록도로 보내졌고 생사 여부도 모른 채 연락이 끊겼다. (당시 한센병 환자들은 소록도로 강제 이주 당했다.) 위안부 징집을 피해 일찍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었다. 자식 여덟을 낳았지만 그 중 절반인 넷을 잃었다. 살아남은 자식에게서 손주 둘을 얻었지만, 그들 역시 너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떴다. 의학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시골 마을에서는 간혹 있는 일이었다. 그런 시절이었다.

     

    박해시대 그리고 하느님 체험 ; 할머니 시점 신앙 고백  

     

    교우촌이 삼삼오오 생기던 박해시대. 큰어머니는 보름 내지 한 달에 한 번씩 작은 책을 들고 남몰래 어딘가를 다녀오곤 하였다. 큰어머니가 돌아오면 할머니께서는 저주의 말을 퍼붓고는 집안에 있는 십자가, 성상으로 보이는 물건들을 때려 부수는 게 일이었다. 어린 시절 기억하는 천주교는 그런 것이었다. 할머니가 그렇게 큰어머니를 구박하고 신앙생활을 못하게 해서 내 인생이 모질고 자식들을 넷이나 잃은 것은 아닐까...

     

    전기, 수도, 도시가스가 없던 옛날식 집을 현대식으로 공사하는 어느 날 큰 딸과 손주가 찾아왔다. 우리 집안의 유일한 천주교 신자인 큰 딸은 한 번도 나에게 성당에 가자고 권유한 적이 없다. 한스러운 내 삶, 신의 존재가 와 닿을 리 없었기 때문이다.

     

    공사가 끝나자 집에 형광등이라는 것이 처음 생겼다. 큰 딸과 함께 잠을 청하는데, 형광등 뒤로 열십(十) 자가 그려졌다. 글은 몰랐어도, 열십(十) 자는 알 수 있었다.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비볐다. 그러자 그 옆으로 또 다른 열십(十) 자가 생겨났다. 얼른 딸을 깨웠다. 딸도 그 두 개의 열십(十) 자를 보았다. 딸은 함께 기도하자고 했다. 딸과 함께 무릎 꿇고 기도한 후에야 두 개의 열십(十) 자가 차례대로 사라졌다. 다음 날 바로 읍내에 있는 성당에 가서 세례를 받겠다고 했다.

     

    <출처: Photo by Billy Huynh on Unsplash>


    아버지 그리고 환희의 신비

     

    묵주기도의 신비를 알게 된 건 몇 년 전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신비는 ‘환희의 신비’다. 세례명(노엘라;성탄) 때문인 것도 있고, 나자렛의 처녀 마리아의 응답이 주는 울림이 컸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유일하게 외우시던 기도가 주모송과 ‘환희의 신비’였다는 걸 알게 된 건 그로부터 몇 년 후다. 매일 새벽 ‘아부지…’로 시작하는 통성 기도와 환희의 신비로 바치는 묵주기도가 할머니의 기도 루틴이었다. 외가에 놀러갈 때마다 잠결에 늘 할머니의 기도 소리를 들었다. 할머니는 ‘하느님’이라고 하지 않았다. 구수한 사투리로 항상 ‘아부지...’로 기도를 시작하셨다. 그 기도 안에는 가족들에 대한 걱정과 사랑, 자신의 죽음에 대한 청원이 담겨 있었다. 그러한 기도와 헌신 덕분인지 할머니는 늘 당신이 기도하시던 대로 평안하게 잠든 채 돌아가셨고, 나에겐 모태 신앙의 뿌리가 단단해졌다.

     

    <출처: 보건보지부>

     

    할머니와 달리 나는 신앙 속에서 생을 시작했다. 그 사실이 부담으로 느껴진 적은 아직 한 번도 없다. 그저 감사할 뿐이다. 앞으로도 이 마음이 지속되도록 할머니가 물려주신 신앙의 유산을 성실히 지켜가고 싶다.

     

     

    송수빈 노엘라 | 청년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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