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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월호 생각의자] 굳은살
    • 등록일 2023-05-24
    • 작성자 관리자
    • 조회수 182
  • 굳은살

    2011년 2월에 수품을 받았으니 12년하고도 2개월 정도 신부로(때때로 신부 노릇 하며) 살아온 것 같습니다. 지금도 신부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묻고 삽니다. 선배에게도, 후배에게도, 때로는 나에게도 자문합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알겠는데, 해야 할 것에 대해서는 빠르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어찌어찌 버티면서 살아오지 않았나 싶어요. 

     12년에 2개월을 살아오면서 가장 많이 본 것이 무얼까 생각해 보니 성경도 기도서도 아닌 사람들의 손바닥인 것 같습니다. 영성체할 때 아주 간혹 입을 벌리고 혀를 내미는 분들도 계시지만, 대부분 신자는 자기 손바닥을 펼쳐 보여줍니다. 제 눈이 지문인식 기계만큼 정확하지는 않지만, 신자들의 손바닥을 보면 그분들의 삶을 조심스럽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굳은살이 넓게 자리매김한 손, 손바닥을 활짝 펼 수 없을 만큼 아픈 손, 손가락 마디가 사라진 손, 상처가 아물어 가는 손, 여기저기 갈라진 손, 손바닥을 내보이기 부끄러워하는 손도 있습니다. 물론 길쭉하고 하얗고 잘 관리된 손도 있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제 손바닥도 슬쩍 봅니다. 아주 작은 사마귀들이 여럿 보이고, 좋아하는 운동 때문에 손바닥과 손가락 마디에 작은 굳은살도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선천적으로 고운 피부는 아니지만 노동과는 거리가 먼 부끄러운 손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특히 노동으로 인한 굳은살이 아니라 취미로 생긴 굳은살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려주는 것 같아서 더 부끄러워집니다. 
     


     신부가 되겠다고 훈련받기 시작한 지 23년 2개월 동안 제게 새겨진 굳은살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신부로서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해 보면 생산적인 일들은 없었던 것 같아요. 물론 가치관이나 신앙에서 비롯되어 생산에 영향이나 영감을 줄 수는 있지만, 직접적인 생산활동을 하지 않지요. 반면 가장 많이 했던 행동은 소비였던 것 같아요. 같이 식사하고 술 마시고, 재화를 사용하면서 활동을 이어가는 것들이 대부분 소비와 연관되어 있어요. ‘순수 소비집단’이라고 자책하듯 했던 말들이 현실이었던 것 같아요. 
      
     소비는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행위입니다. 주린 배를 만족시키기 위해 식재료를 사거나 식비를 지불합니다. 타인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소비를 하기도 합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소비죠. 역설적으로 내 삶이 만족스럽다면 소비할 것도 없겠지요. 하느님 나라를 위한 소비는 어떤 소비일까요?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소비는 어떤 소비일까요? 최소한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하거나, 고통이 전제된 소비는 피해야겠지요. 일회용품을 양산하는 소비,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해 내 만족을 얻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제 입장에서는 공정무역 커피를 찾고, 공정한 임금을 지불하고 생산한 것을 소비하는 것 정도가 생각이 납니다. 굶는 이들을 위해 기부를 하는 행위도 선한 소비일 것이고, 적정한 주거를 제공받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캠페인에 가담하는 것도 선한 지향의 소비일 테지요.  



     마태오 복음 20,1-16은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입니다. 이른 아침에 만난 일꾼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했고, 아홉 시에 만난 이들과도 같은 조건으로 합의합니다. 주인은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 오후 다섯 시에 만난 사람과도 같은 조건으로 계약합니다. 저녁때가 되어 포도밭 주인은 자신과 계약한 일꾼들을 불러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시작해서 모두 한 데나리온씩 지급합니다. 가장 늦게 온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지급받자 이른 아침에 온 사람은 더 받을 기대감에 기분이 좋아지지만, 막상 자기에게 주어진 몫은 한 데나리온입니다. 새벽에 온 사람은 억울한 마음이 들었을 것 같아요.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겠죠. 하지만 오후 다섯 시에 와서 한 데나리온을 받은 사람이 자기 아들이나, 아버지라면 그 사람은 억울해했을까요? 아니면 기뻐했을까요? 하느님의 손길은 같은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내 마음은 대상과의 관계에 따라 달라집니다. 늦게 온 일꾼을 보며 내 모습일 수도 있겠다는 연대 의식을 가졌더라면 이른 새벽에 온 일꾼은 화가 나거나 억울해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이 비유에서 우리는 또 다른 사회교리의 원리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어요. 주인은 굳이 오후 다섯 시에 나가서 일할 사람을 구할 만큼 노동하고자 하는 인간에 대한 존엄성도 있었던 것 같아요. 자신의 재화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고루 쓰여야 한다는 마음도 있었던 것 같고요. 포도밭 일을 통해 자신과 가정의 자기완성을 위한 공동선을 실현할 기회를 제공한 주인의 모습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른 아침에 온 사람이나 늦은 시간 노동에 참여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하루를 살아갈 수 있을 만큼의 급여를 제공한 주인은 사회적 약자를 배제하지 않았습니다. 늦은 시간까지 일을 찾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책임지기 위한 참여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미사 때 그러하듯 언제가 우리도 포도밭 주인을 마주하게 된다면 손바닥을 펴고 그분 앞에 내밀게 될 것 같아요. 그분은 한 데나리온을 건네주실 것입니다. 그것을 받는 손바닥에 새겨진 흔적들에서 포도밭 주인의 모습을 얼마나 닮고자 했는지, 아니면 소작인들과 연대하고자 했는지, 우리는 알 수 있겠죠. 한 데나리온을 받은 나는 주님 앞에서 어떤 마음이 들까요? 나의 삶과 내 삶의 일부를 구성하는 소비생활이 적어도 위와 같은 흔적들을 닮아야 할 텐데 말입니다. 복부를 둘러싼 지방들이 제 삶의 굳은살이 될까 심히 걱정됩니다. 

    (객월(客月) ‘생각의자’ 끝자락에 김비오 신부님의 글이 ‘굳은살’로 마무리되어 ‘굳은살’을 소재로 이어 써봐야겠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글입니다.)
    

    손훈 마티아 신부님

    (빈민사목위원회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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