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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omilia 2018-03]2018년 10월 7일 연중 27주일 강론
    • 등록일 2018-10-05
    • 작성자 관리자
    • 조회수 52
  • 2018년 10월 7일 연중 27주일 강론

     

     

    정수용 이냐시오 신부

    천주교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

     

     

    찬미예수님...

     

    오늘 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전반부인 루카복음 10장 2절에서 12절까지는 혼인에 대한 규정을 두고 바리사이들과 다른 해석을 보이는 예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후반부인 같은 장 13절에서 16절까지는 어린이를 축복해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먼저 앞부분을 보면,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찾아와 이혼에 대한 율법 규정을 묻습니다. 그들은 신명기 24장 1절의 “어떤 남자가 여자를 맞아들여 혼인하였는데, 그 여자에게서 추한 것이 드러나 눈에 들지 않을 경우, 이혼 증서를 써서 손에 쥐어주고 자기 집에서 내보낼 수 있다.”는 규정을 들어가며 이혼이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고대 사회에서 여자가 남자의 소유물처럼 인식되던 때에, 이 규정은 설령 부정한 일이 있더라도 남편이 아내를 버리게 되면 그 여자는 생계를 꾸려갈 수 없으니 이혼장을 써주어 다시 재혼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남자가 여자를 버릴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비록 집에서 나가게 하더라도 다른 사람과 다시 혼인하여 생계를 이어갈 수 있도록 이혼장을 써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혼장만 있으면 언제든 아내를 내보낼 수 있다는 내용으로 남용되었습니다. 게다가 ‘추한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도 자의적으로 해석했기에 당시 여인의 처지는 매우 위태로운 사회적 약자의 신분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남용하는 그들은 꾸중하시며 창세기 1장 27절과 2장 24절을 드시며 하느님이 정하신 혼인의 정신을 말씀하십니다. 바로 하느님께서는 동일한 가치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이들이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둘이 아니라 하나를 이루는 것이 바로 혼인임을 강조하십니다.

     

    또한 오늘 복음 후반부에서도 어린이에게 축복을 청하는 사람들을 못마땅해하며 귀찮아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어린이가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 하시며,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당시 사회에서 어린이가 독립된 한 인격체로 취급받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며 상당히 파격적인 말씀입니다. 오늘날에도 시쳇말로 “쪼끄만게 뭘 알아!”라는 표현에서처럼 어린이는 쉽게 무시당하고, 자신의 원의를 모두 어른들을 통해서만 충족할 수 있는 약한 존재입니다. 당시 사회는 오늘날보다도 훨씬 더 아동의 권리와 인권이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시대에 예수님은 어린이들의 순수함과 부모에 대한 신뢰의 마음이 곧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는 것과 같은 마음이라 하시며 어린이를 존중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 복음은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을 먼저 생각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소모품으로 취급받으며 언제든지 버려질 수 있었던 여인들도 남자와 동일한 가치를 가지는 인격체라는 것, 아직 어리기에 자신이 스스로 생존할 수 없고 늘 의존적일 수밖에 없는 어린이를 존중해주신 것은 언제나 약한 이들의 정당한 권리를 찾아주셨던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사회적 약자들이 어려움을 겪는 것들을 보면 모두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당시 율법의 틀 안에서 여인들이 버려졌던 것이 불법이 아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또, 사회적 약자들이 당하는 어려움은 시대의 편견과 관습에서 당연하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마치 예수님 시대에 어린이들이 무시당하는 것이 의심받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의 법과 규정의 틀보다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더 윗자리에 두셨습니다. 그러하기에 언제나 약한 사람들을 보실 수 있었고 정당한 그들의 권리를 이야기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간추린 사회교리 144항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과 닮은 모습으로 창조된 피조물이니만큼 동등한 존엄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영광이 어느 정도 모든 사람의 얼굴을 비치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 앞에 모든 사람이 지닌 존엄성은 인간이 다른 사람 앞에서 갖는 존엄성의 기초가 된다. 또한 이것은 인종, 국가, 성별, 출신, 문화, 계급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 사이의 근본적인 평등과 우애의 궁극적이 바탕이다.”

     

    복음과 교회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불합리한 차별이 존재합니다. 과도한 빈부의 격차, 이주민에 대한 거부감, 그리고 약자에 대한 혐오발언 등은 우리 신앙과 공존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법과 제도, 규정과 통념이란 이름 안에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나와 동일한 존엄을 가지고 있음을 잊게 될 때 오늘 여인들을 대하시고 어린이들을 대하셨던 예수님의 마음과 태도를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흔히들 “인권 감수성”이란 표현을 사용합니다. 복음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삶을 기억할 때, 우리도 모든 사람들을 존중할 수 있는 인권 감수성을 키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이 곧 하느님 나라를 향한 마음입니다.

     

    잠시 묵상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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