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31일 부산 건설 현장에서 추락해 세상을 떠난 고 정순규(미카엘) 씨의 5주기 추모 미사가 연천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원에서 봉헌됐다.
지난 31일 정순규 씨 가족과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정의평화위원회가 함께 마련한 추모 미사에는 그동안 진상 규명을 위해 함께한 이들이 참여했다. 의정부교구 이종원 신부, 올해 서울 마포구 건설 현장에서 추락사한 고 문유식 씨의 딸 문혜연 씨도 이 자리에 함께했다.
정순규 씨 5주기인 10월 31일 그가 잠든 봉안당이 있는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원에서 추모 미사를 봉헌했다. ⓒ정현진 기자
아버지 아들로서 더 크게 목소리 키울 것
생각보다 많은 이가 좋은 세상 위해 노력한다는 것 기억하자
2019년부터 아버지 정순규 씨의 사건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위한 활동을 해 오고 있는 정석채 씨(비오)는 “지난 5년간 단 한 순간도 쉽지 않았고, 정말 많이 외면받았다”면서도, 진상 규명과 소송 매 순간에 여러 활동으로 연대해 준 이들에게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그는 겪으면 안 되는 산재로 하루에 3-4명씩 일터에서 죽어 가는 일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면서, “하지만 싸우고자 하는 유가족은 여전히 극소수다. 싸우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시민 사회나 노조의 선택을 받지 못한 사건들은 외면받는 현실도 개탄스럽다”고 토로했다.
정석채 씨는 “5주기를 맞아 싸움 방향을 다시 정했다. 아버지 정순규 씨의 진상 규명은 물론, 아버지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기 위한 준비도 할 것”이라며, “5년간 처절하게 싸웠는데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현실에서, 목소리를 더 키워야 하겠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든다”고 말했다.
정석채 씨의 친구로 그동안 곁을 지켜 왔던 백인주 씨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지옥 같은 터널을 벗어날 수 있을까, 끝이 있을까 생각했지만 조금씩 우리가 가는 길에 빛이 비추고 있는 것 같다”면서, “함께 어떻게는 버티고 나눴기에 그동안의 시간이, 오늘의 공간이 가능했던 것 같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이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난 5년간 단 하나도 쉬운 것이 없었다는 정순규 씨 아들 정석채 씨는 "그럼에도 더 큰 목소리를 낼 것"이라고 말했다. ⓒ정현진 기자
생명보다 공사가 중요한 인우종합건설에 엄벌 요구
이날 미사에 참여한 문혜연 씨는 1월 22일 인우종합건설 노동자로 서울 서교동 공사 현장에서 추락해 숨진 아버지의 이야기를 전하고 연대를 호소했다.
고 문유식 씨에게 일어난 사고는 불안정한 구조물을 딛고 일하던 중 2미터 높이에서 떨어진 것으로, 대부분 산재 사고 원인인 사측의 안전 관리 부재였다. 사측의 대응 역시 앞서 일어난 수많은 사고와 같았다. 인우종합건설은 관련 서류를 조작하고 진술을 막았으며, 가족에 대한 최소한의 사과도 없었다.
문혜연 씨는 지난 30년간 건설 현장에서 사고 한 번 겪지 않은 숙련 노동자였던 아버지가 출근한 뒤 돌아오지 못했고, 일주일 간 의식을 잃은 채 투병하다가 돌아가셨다면서, “사고 다음 날에도 사고 현장에는 안전모를 착용하지 않은 노동자들이 일을 하고 있었고, 사측은 공사 기일을 맞추는 것에만 급급했다”고 말했다.
그는 불안정한 구조물, 안전 난간도 없는 상황에서 작업하다가 떨어진 아버지의 죽음은 사측의 주장처럼 불운해서가 아니며, 당시의 작업 환경은 오히려 운이 좋아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었다면서, “아버지의 사고는 예측 가능하고 예방 가능한 것이었다. 안전모, 안전 난간, 고정 장치만 있었어도 막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문혜연 씨는 아버지가 사경을 헤맬 당시 현장 소장이 공사 끝날 때까지만 아버지가 살아 있기를 기도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면서, “공사가 중단되지 않는 것이 생명보다 중요했던 인우종합건설을 용서할 수 없다. 피해자와 유가족을 위로하고 같은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사측 엄벌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문유식 씨의 가족들은 현재 사측과 소송을 이어 가고 있으며, 엄벌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받고 있다.
올해 1월 서울 서교동 건설 현장에서 추락해 사망한 문유식 씨의 딸 문혜연 씨는 인우종합건설을 대상으로 한 싸움에 연대해 달라고 호소했다. ⓒ정현진 기자
이종원 신부(동두천 성당)는 자신 역시 산재 피해자의 가족이라며, 산재 인정을 받기 위해 오랜 싸움을 했던 경험으로 정석채 씨에게 “긴 싸움이 될 것이라는 걸 반드시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면서, 여러 억울한 죽음, 참사를 보면서 싸움의 본질을 잃어버리는 경우를 볼 때 가장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그는 말도 안 되는 상황들을 맞닥뜨리게 되는 와중에도 자신의 존엄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고 덧붙이면서, “사제로서 끊임없이 그들을 기억하고 기도하면서도 힘이 빠질 때가 있다. 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함께 기억하는 사람들 덕분에 나아갈 수 있었다. 그것이 아마 정석채 씨가 5년을 지나올 수 있는 힘이었을 것이며, 기억하는 이가 많지 않지만 또한 없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자”고 말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김비오 신부는 이날 강론에서 마태오 복음 산상설교를 언급하고, “모든 이가 행복을 꿈꾸고, 산재 책임이 있는 경동건설, 인우종합건설에서 일하는 이들도 행복을 원할 것이다. 그러나 같아 보이는 행복은 조금 들여다보면, 다른 이들의 행복을 파괴함으로서 얻는 행복도 있다”며, “의로운 이들의 행복은 나, 우리만의 행복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행복이 함께하는 행복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행복의 크기를 숫자, 특히 돈으로 생각하는 세상에서 의로운 이들이 피해를 당하고 행복이 파괴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들의 욕심이 우리의 진정한 행복을 빼앗을 수 없다고 강조하면서, “예수님이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고통과 절망, 슬픔을 짊어졌지만, 결국 부활로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 줬다. 우리의 행복은 고통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이겨낸 결과”라고 말했다.
김 신부는 사랑하는 대상을 빼앗겼기 때문에 겪는 슬픔과 고통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것을 이겨냄으로써 누구도 깨지 못하는 행복과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며, 정순규 씨의 가족들이 슬픔과 절망과 분노를 받아들이고 극복하는 모든 시간을 위로했다.
한편, 10월 28일에는 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회, 노동사목위원회도 고 정순규 씨의 5주기 추모 미사를 봉헌했다.
이날 정의평화위원장 이영훈 신부는 “네 아우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는 성구의 물음은 "우리 형제의 죽음에 대해 우리의 책임이 과연 없는가, 또 그들의 죽음에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는가 묻는 질문”이라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가 함께 찾고 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 신부는 “그러나 여전히 수많은 이가 산재와 참사로 인한 죽음을 덮고 빨리 잊으라고 한다”면서, “이런 참사와 죽음은 잊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들의 죽음이 다른 죽음으로 이어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며, 우리 사회의 성찰을 위해서다. 이 추모 미사 역시 더 많은 이가 죽지 않도록 기억하며, 그 기억을 바탕으로 사회를 바꾸기 위한 시간”이라고 말했다.
정현진 기자 regina@catholic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