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 속 위험에 라벨을 붙여볼까요?

일하는 곳에 경당이 하나 있습니다. 등받이 없는 나무 의자 스무 개 남짓 놓인 자그마한 공간. 저와 동료들은 여기에서 미사를 드리기도 하고, 성체조배를 하거나 틈내어 기도합니다. 여러분은 기도할 때 가장 먼저 무엇을 청하는지요. 첫 번째로 의탁하는 것은 얼마나 간절한 것일까요. 저는 항상 돌아가신 아빠를 위해 먼저 기도합니다.
‘아파트 건설 현장 20층서 떨어진 철근에 맞아 근로자 숨져’
‘18시간 연속 근무하던 외국인 노동자 압축 성형기에 끼여 숨져’
오늘 포털사이트에 접속하자마자 보이는 기사 가운데 노동자 사망 소식이 있었습니다. 이런 뉴스는 어제도 그제도 있었지요. 거의 매일 노동자의 죽음을 접하는 나의 마음은 어떠한가요. ‘또 산재인가?’ 단신(短信)으로 소비되는 인터넷 기사처럼 찰나의 안타까움이 코앞에 머물다 이내 흩어지는지, 아니면 심장을 칼로 도려내는 듯한 아픔이 쌓이는지.
노동자가 일하다 돌아가셨다는 뉴스를 들으면 마음이 어떤지 엄마께 물었습니다. “말해 뭐하냐, 가슴이 철렁하지. 너무 속상하고. 가신 분들이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들지. 느이 아빠처럼 일하다가 죽은 사람들이 제일 불쌍해! 산 사람은 살아. 죽은 사람이 제일 불쌍해.” 얼마만큼 안타깝든 존엄을 빼앗긴 환경에서 한 사람이 죽음을 맞이했고 그 죽음 뒤로, 현장을 목격한 동료와 혈육을 잃은 가족의 고통이 남겨지겠지요. 그 고통은 토막 소식처럼 짧게 맴돌다 사라지면 좋으련만, 대개 평생 따라다닙니다. 가족을 여의고도 때때로 웃으며 살지만, 어느 날은 나도 모르게 그 일이 떠올라 다리가 풀려 주저앉고 떠난 이가 불쌍해 가슴이 미어집니다.
일하다가 사고로 숨지는 노동자가 몇 명인지 정확히 알고 계시나요. 지난 4월 15일 발표한 고용노동부 통계 자료를 보면 2020년에 882명이 그리되었습니다. (일하다 병을 얻어 돌아가시는 분들은 이보다 많습니다.) 통계를 좀 더 들여다보니 돌아가신 882명 중에서 328명이 ‘떨어짐’으로 죽고, 98명이 ‘끼임’으로 죽었습니다. 72명이 ‘부딪힘’으로, 71명이 ‘물체에 맞음’으로, 64명이 ‘깔림·뒤집힘’으로 죽었습니다. 249명은 사업장 외 교통사고(54명)와 화재(46명), 기타의 재해 유형(149명)으로 돌아가셨지요.

<출처: 시사인 612호>
882명 중 639명이 50세 이상이었습니다. 저처럼 아빠나 엄마를 여읜 자식들이 많겠지요. 137명은 40대였습니다. 대부분 어린 자녀를 두었겠지요. 18세~39세의 사망자는 106명입니다.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통곡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사망사고는 건설업과 제조업에서 압도적으로 많이 발생했습니다. 건설업 중에서는 공사금액이 적을수록, 제조업 중에서는 사업장 규모가 작을수록 사고사망만인률이 높은 경향을 보입니다. 외국인 사망자는 94명이었습니다. 이런 숫자가 나에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나요.
노동자를 단순히 생산도구, 물질적 가치만을 지닌 단순한 노동력으로 격하시키려는 모든 경제적 신조나 물질주의는 노동의 본질을 왜곡할뿐더러 노동에서 그것의 가장 숭고하고 근본적인 인간적 합목적성을 빼앗게 될 것이다. (간추린 사회교리 271)
사람이 죽는 일터 환경은 왜 변화되지 않을까 생각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비용과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경영 때문에? 기업이 안전관리를 소홀히 해서? 안전교육이 충분하지 않아서? 정부 기관의 관리·감독이 미흡해서? 노동자의 안전의식이 허술해서? 가벼운 처벌과 규제 때문에? 모두 다 이유가 될 수도,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겠지요. 사안마다 다르겠지요.
통계 자료 속 재해 유형을 다시 보았습니다. 떨어짐, 끼임, 부딪힘, 물체에 맞음, 깔림, ... 아무리 봐도 제 눈엔 이상합니다. ‘사람’이 일하는 곳에 이런 죽음의 위험이 존재하도록 놔두는 게 믿기지 않네요. 이런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미리 어떤 ‘장치’를 둘 수는 없었던 걸까요. 사람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장치, 사람이 끼이지 않게 하는 장치, 물체에 맞지 않도록 하는 장치, 깔릴 수 없게 하는 장치. 너무 단순한 생각일까요? 단순하면 안 되는 이유는 또 뭔가요 사람이 죽고 사는 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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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장치가 있었다면 모두 막을 수 있던 사고입니다. 인명이 재천이기 때문에, 하필 그날 재수가 없어서, 노동자가 부주의해서 죽은 게 아니라, 있어야 하는 뭔가가 없어서 사고가 난 것이지요. 떨어짐을, 끼임을, 부딪힘을, 깔림을, 괴롭힘을 미리 막을 장치가 쏙 빠진 자리에 죽음이 채워졌습니다. 그게 안전장치이든 안전의식이든. 우리 사회는 여전히 그게 없어서 일하던 사람이 존엄을 훼손당하고 죽습니다.
나의 일터는 어떠한가요? 내가 일하는 곳에는 어떤 ‘장치’가 구체적으로 필요한지 삼삼오오 모여 얘기 나누어 볼까요? 자신이 운영하는 사업장에 어떤 위험 요소가 있는지 상세히 모르는 사업주도 있겠지요. 그것은 노동자도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동료들과 함께 우리 일터 환경은 무엇이 괜찮은지, 무엇이 괜찮지 않은지 얘기를 나누어 보면 어떨까요. 의식하지 못하거나 감추어진 위험을 꺼내 라벨을 붙이면, 개선에 대한 요구와 실천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 되기까지 갈 길이 멀고 험난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인간의 존엄과 생명을 무엇보다 우선시한다는 합의를 진정으로 이룰 때까지 동료들과 함께 노력해봅시다. 방법은 그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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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당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호롱불이 켜진 감실 앞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떠올립니다. 고난으로 가득 찼던 여정의 끝이 사랑의 완성이었음을 기억합니다. 그 사랑으로 빚은 한 사람 한 사람이었으나, 그만 비참하게 숨지고 만 노동자들을 위해 먼저 기도를 드립니다. 가족과 동료들이 조금 더 일찍 평안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타인의 훼손된 존엄에 둔감해지지 않기를 빕니다.
박효정 기획팀장
천주교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