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목이야기

생각을 나누다

우리가 잃어버린 부끄러움

Fr.비오

우리가 잃어버린 부끄러움

오래 전,
한 아이가 제게 귓속말로 들려준 속삭임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려 합니다.

몇 년 전이었을까요.
성당 마당에서 아이들과 어울려 놀다 잠시 화단에 걸터앉아 쉬고 있을 때였습니다.
유치부 아이 하나가 다가오더니 재잘재잘 제게 자신의 세상을 들려주기 시작했습니다.
"신부님, 친구 누구는요, 뭐를 좋아하는데요, 저는요 뭐가 좋고요~." 
그다지 특별할 내용이 없는 아이의 일상 이야기었고,
저는 가벼운 산책을 하듯 편안하게 그 아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무슨 비밀이라도 말하려는 듯 제게 바짝 다가와 속삭였습니다.

"그런데요 신부님, 우리 집은요, 쪼그매서요, 방이 한 개예요." 

순간 제 마음의 가볍던 발걸음이 덜컥 멈추어섰습니다.
어디를 향해 발걸음을 마저 이어가야 할지, 난감한 길목에 와버린 기분이었지요.
아이가 자신의 집을 부끄러워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어떤 대답을 해주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이 곤혹스러움이 표현될 겨를도 없이 아이는 마저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그래서요, 잠도 엄마랑 아빠랑 다 같이 잘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

자신의 세상을 들려주는 것만으로도 아이에게 고마울 따름이었는데,
더더욱 고맙게도 아이는 어찌할 바 몰라하는 제게 전혀 예상치 못했던 선물을 들려주었습니다.
아이의 속삭임은 세상 따뜻한 사랑을 담고 있었던 것이었죠. 평수의 부끄러움이 아니고 말입니다.
아이의 속삭이던 그 목소리가 잔향이 되어 묻습니다. 저는 왜 그 순간 곤혹스러웠던 것일까요?
아이가 자신의 좁은 집을 부끄럽게 여겼을 거라 생각한 제 무의식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그러곤 자문해보게 됩니다. 우리 어른들은 그동안 무엇을 부끄러워하며 살아오고 있었던 것일까요.

달동네, 반지하, 임대주택, 다 닳아 떨어진 운동화, 구멍 난 양말, 땀투성이의 작업복.
물질적 궁핍함이 묻어나는 거주지, 변변찮은 차림새, 땀흘리는 직업 등은 부끄러움이 되곤 했습니다.
마음대로 가누지 못하는 몸, 또렷하게 발음되지 않는 말, 좀 더 제한된 인지력.
장애라는 이름의 신체적 혹은 지적인 다름 등도 부끄러운 것으로 여겨지곤 했습니다.
애환이 진하게 배어나는 우리네 삶은 그렇게 그 자체로 가난을 상징하는 것이 되었고,
어째서인지 영문도 모른 채 우리 어른들에 의해 부끄러움의 대상이 되어버리곤 말았습니다.

이 부끄러운 '부끄러움'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우리가 참으로 부끄러움이라고 해야 할 것은 저 가난이 아니겠습니다.
작은 집, 허름한 옷, 짧은 가방끈, 신체적 어려움, 고달픈 노동 등
우리에게 부끄러움이 되어야 할 것은 이와 같은 것들이 아니라
가난이라는 단어로 대변되는 삶을 한낱 부끄러움으로 여기게 하는 우리의 '그 무엇'일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 무엇'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해 나가야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무엇이 참으로 우리의 부끄러움인지를 잃어버린 채,
한없이 부끄러운 삶만을 살다가 부지불식간에 하느님의 공의를 만날 수밖에 없게 되겠지요.
한 아이의 선물과도 같았던 수 년 전 속삭임으로부터 오늘을 거듭 성찰해봅니다.

지금 나의 삶은 정녕 무엇을 부끄러움으로 여기며, 또 무엇을 참 행복으로 여기고 있습니까?

"많은 노동자가 하수도를 청소하는 것이 더는 부끄러움이 아니고,
다만 우리의 그 벗들이 쓰레기와 오물을 치우도록 하수도를 채우는 것이 부끄러움이겠다.
또 흔하디흔한 신발을 신고 손님으로 가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자기 구두를 보호하느라 구두 위에 방수용 장화까지 겹쳐 신고
맨발인 사람들을 지나쳐 가는 것이 부끄러움이겠다.
프랑스어나 새로운 소설을 모르는 것이 부끄러움이 아니고,
자신들의 빵이 어떠한 수고를 거쳐 준비되는지도 모르고 빵을 먹는 것이 부끄러움이겠다.
... (노동의 흔적인) 더러운 손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부끄러움이 아니고,
양손에 (노동의) 굳은 살이 없는 것이 부끄러움이겠다."


- 톨스토이의 "What Shall We Do?" 중 일부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