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목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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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괜찮은가요? ‘야간노동’
11시가 가까운 늦은 저녁 집 앞 편의점에 들렀습니다. 카운터에 계신 분이 마치 아는 사이처럼 반갑게 인사했습니다. “안녕하세요! 늦으셨네요.” 분명 편의점 사장님은 아닌데, 누구신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아 어색하게 목례만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기억에 잊혔다가 동네 안경점에 가서야 안경점 사장님이 편의점 카운터에 계셨던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니, 왜 편의점에 계셨냐고 여쭈었더니 아이들 학원비라도 벌려고 지난해 가을부터 일주일에 2일 밤새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있고, 운영하는 안경점도 주 6일 영업을 그대로 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안경점과 편의점 모두 손님이 없어 대기하는 시간이 길지만 육체적으로 무리가 되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습니다.   요즘 자영업자들이 어렵다는 얘기는 익히 들었지만 이렇게 투잡(겸업), 그것도 야간노동을 하고 계신다니 가장의 무게가 새삼 짐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장님은 힘들지 않다고, 할만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애써 그리 말씀하시는 것이리라 생각되었지만 딱히 뭐라 드릴 말씀이 떠오르지 않아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 마시라는 인사를 남기고 매장을 나왔습니다.   이제 밤낮을 바꿔 일하는 일상은 더 이상 낯설지 않습니다. 보건·의료, 방송·통신, 제조·물류는 물론 편의점까지 2·3교대의 밤샘 노동은 우리 사회 곳곳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임시직 인턴 연구원으로 일하는 제 아들마저 프로젝트 마감을 앞두고 밤샘 작업 후 몰아 자는 일이 잦아져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걱정하는 부모에게 아들은 괜찮다고만 합니다.   지금은 괜찮은 것만 같은 그 야간노동이 지속되면 암을 유발할 만큼 위험하다는 사실은 아직 멀게만 느껴집니다. 당장의 생계와 좀 더 많은 소득을 위해 또는 집약적인 성과나 결과물을 내놓기 위해 오늘도 많은 이들이 밤을 새워가며 일하도록 내몰리고 있습니다.   얼마 전 쿠팡 사태로 불거진 ‘새벽 배송’이 논란이 되며 대형마트의 심야영업과 온라인 주문·배송을 제한하는 ‘새벽 배송 금지’ 규제를 완화하는 입법이 추진되고 있다는 보도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니, 주말·심야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휴식권을 보장하기 위해 도입된 사회적 장치가 다시 대형마트를 비롯한 관련 업계 종사자들의 ‘야간노동’을 늘리는 방향으로 추진된다는 것이 우려스러웠습니다.   ‘새벽 배송’에 대하여 노동계는 '건강권'을 이유로 반대하고, 유통업계는 '생존권'을 내세우며 맞서는 상황입니다. 골목상권을 위협한다는 소상공인의 입장 그리고 ‘새벽 배송’에 익숙해진 소비자의 요구 등 법안을 만들어야 하는 정치권의 이해관계까지 얽히며 논란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보수 경제지에서는 일부 배송 기사들은 ‘새벽 배송 금지’를 반대한다는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얽힌 논란이 합의를 향한 공론의 장을 마련할 기회가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야간노동’과 ‘새벽 배송’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하는 우리 사회의 고단함을 먼저 바로 잡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투잡’이라도 해야 생활이 가능한 가장들과 장 볼 시간조차 없어 새벽 배송을 끊을 수 없는 우리들의 일상이 바뀌지 않는다면 누군가의 ‘야간노동’은 멈출 수 없을 것입니다.
베로니카
'모든 사람들의 희년’을 꿈꾸며
비행기를 타고 가는 여행이라곤 제주도뿐이었던 저는 작년 12월 큰 도전을 했습니다. 2025년 자비의 희년에 떠나는 생애 첫 이탈리아 여행. 이 여정은 저에게 평생 잊지 못할 풍경들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로마의 고풍스러운 골목을 걷고, 화면으로만 보던 거장들의 작품과 바티칸 박물관의 예술품을 실제로 마주했을 때의 감동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이번 여행은 가톨릭교회가 선포한 ‘희년’이라는 특별한 시기에 이루어져 의미가 더 깊었습니다. 여행 메이트가 신부님이었던 것과, 현재 로마에서 사목 중인 본당 시절의 인연인 신부님을 만나 뵐 수 있었던 것 역시 큰 축복이었습니다. 신부님들은 성지 구석구석을 안내하며 역사와 신앙의 유래를 상세히 설명해 주셨고, 함께 미사를 봉헌하며 관광만이 아니라 순례자로서 은총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웅장한 대성당의 제대 앞에서 기도를 바치던 그 순간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하지만 긴 여행을 마치던 마지막 날, 로마에서 유학 중인 한 청년과 신부님들이 함께한 식사 자리는 이번 여행을 되돌아보며 성찰의 시간을 갖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유학 생활 중에도 틈틈이 수녀님들과 노숙인 봉사를 해왔다는 그 청년은, 제가 미처 보지 못했던 희년의 이면을 담담히 들려주었습니다.   “사실 이곳의 가난한 이들은 희년을 싫어합니다.”     자비와 용서의 해인 희년을 정작 가장 가난한 이들이 기피한다는 말이 먹먹하게 다가왔습니다. 희년을 맞아 몰려드는 순례자들을 위해 대대적인 도시 정비 사업이 벌어지면서, 거리에서 밤을 지새우던 이들은 머물던 삶의 터전에서 밀려나야 했습니다.     치솟는 물가 또한 그들을 괴롭혔습니다. 순례객들로 북적이는 도시는 생필품 가격마저 올려놓았고, 하루 한 끼가 간절한 이들에게 희년은 기쁨의 해가 아니라 생존을 위협받는 혹독한 시기가 된 것입니다. 무엇보다 생각이 깊어졌던 지점은 그들이 마주한 ‘장벽’이었습니다. 누구나 하느님의 자비를 입는다는 ‘희년의 문’을 통과하기 위해 늘어선 인파 속에서, 남루한 행색의 그들이 삼엄한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그들은 기피 대상이라는 이유로 희년의 은총 안에서조차 철저히 소외되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문득 지난해 노동사목위원회에서 진행했던 가톨릭청년교리모임 ‘울림’에서 보았던 영상 한 편을 떠올렸습니다. 과거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을 준비할 때, 도시 정비라는 명목으로 쪽방촌 등 빈민가를 허물고 이웃들을 강제로 몰아냈던 기록들이었습니다. 당시에도 세계적인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그리고 국가적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고 환경을 정비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삶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우리 이웃들의 눈물이 있었습니다. 이탈리아의 노숙인들이 겪는 현실은 그때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거룩한 해를 준비하는 것일까요? 외적인 정돈을 위해 정작 우리가 먼저 품어야 할 약한 이웃들을 밀어내는 것이 과연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모습일지 생각하게 됩니다. 희년의 목적과 취지를 알리기 위해 쏟는 에너지가 정작 그 안에 담겨야 할 ‘사람’을 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저 껍데기뿐인 형식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가톨릭의 희년은 하느님의 자비가 모든 이에게 차별 없이 드러나는 거룩한 해입니다. 진정한 자비는 웅장한 성당의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이 아니라, 그 문턱조차 넘지 못하는 이들의 손길 위에 머물러야 합니다.     “보통 사람들의 희년.”     이탈리아 노숙인들이 내뱉었다는 그 한마디는 이번 여행에서 저에게 가장 큰 울림으로 남았습니다. 그들에게 희년은 모든 이의 은총이 아닌, 준비된 특정인들만을 위한 시간으로 느껴졌던 것입니다. 우리는 희년의 화려함에 가려, 보지 못했던 낮은 곳의 목소리에 더 민감하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문을 통과하는 형식적인 절차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속에 소외된 이들을 향한 ‘자비의 문’을 먼저 여는 일입니다.     희년의 본래 의미를 기억하며, 앞으로 맞이할 모든 은총의 시기가 가난하고 외로운 이들이 먼저 초대받고 환대받는 진정한 기쁨의 장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해 봅니다. 웅장한 성전의 문보다 이웃을 향한 마음의 문을 먼저 여는 것, 그것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진정한 희년의 준비일 것입니다.
마태오
해고 앞에 선 환대의 노동자들, 나는 왜 그들을 엄호하는가
세종호텔 해고자들이 지금 호텔 로비에 들어가서 진짜 사장 주명건 호텔 소유주가 협상에 직접 나오도록 요구하며 농성을 한 지 10여 일이 지났다. 나도 지난 1월 28일 저녁에 시간을 내서 투쟁 문화제에 함께 했다. 해고 노동자들은 코로나19 전염병 대확산으로 투숙객이 줄어들어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는다는 이유로 2021년 12월 10일에 해고되었다. 이들은 ‘부당해고 및 부당노동행위 구제 재심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2024년 12월 18일 대법원은 코로나19 경영 악화를 이유로 세종호텔이 노동자들을 해고한 것은 정당하다고 최종 판결했다.   해고 노동자들의 복직 요구는 이 판결로 끝나지 않았다. 2025년 2월에 고진수 지부장이 호텔 앞 도로 위 구조물에 올라가 코로나19 종식 이후 해외 관광객의 유입으로 호텔 영업이 어느 정도 정상화된 만큼 해고했던 노동자들을 복직시키라고 요구했고, 노동조합은 호텔 측과 협상을 끌어냈다. 그리고 그는 336일 만에 그 구조물에서 내려와 직접 협상에 들어갔다. 이후 노동자들은 호텔 로비를 점거하며 주명건 소유주가 협상에 직접 나올 것을 요구했다. 그가 결정권을 가진 실질적인 소유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텔 측과의 협상은 전혀 진전이 없는 상태다. 그리고 경찰은 2월 2일 호텔 로비에서 농성 중이던 조합원들과 연대 시민들을 연행했다.   오래전에 비정규노동자의 집 ‘꿀잠’에서 누군가를 위한 ‘꿀밥’ 나눔이 있었다. 나는 고진수 노동자를 그 ‘꿀밥’ 나눔에서 만났다. 나 역시 그 자리에 음식을 내놓고 있었고, 그도 일식을 요리하고 있었다. 우리는 손님을 환대한다는 마음으로 같은 주방을 나누어 썼던 경험을 공유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가 세종호텔 식당 주방에서 얼마나 기쁜 마음으로 손님들을 맞이했을지를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사실 호텔은 손님을 환대하는 공간이다. 그를 비롯한 다른 노동자들 역시 환대의 마음으로 그 자리를 지켜왔을 것이다. 그런 이들이 코로나19 대유행이라는 재난을 이유로 하루아침에 그 자리에서 쫓겨났다. 만약 재난이 이유였다면, 재난을 극복한 뒤 복직시키겠다는 약속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한 경영 악화는 노동조합 활동을 혐오하는 이들에게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사법 권력 또한 경영상의 이유를 들어 호텔 소유주의 손을 들어주었다. 해고 노동자들의 마음은 억울함과 분노로 물들었고, 그 감정은 다시 싸움을 시작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1년 전, 고진수 지부장은 쌀쌀한 날씨 속에서 도로 위 구조물에 올랐다.   내가 세종호텔 해고 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적 엄호’ 활동을 하는 이유는 그들의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깊이 공감했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생존권을 무시하고 쉽게 해고하는 행위는 안전한 삶의 경계를 짓밟는 폭력이다. 나는 법 해석보다 피해자가 느끼는 억울함과 분노 속에 더 많은 진실이 담겨 있다고 믿는다. 법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법 권력이 모호한 법 해석을 통해 기득권 유지의 도구로 작동했던 사례를 우리는 수없이 보아왔다.   2천 년 전 예수 역시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편에 서서 율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던 권력자들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래서 나는 잘났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무시당하고 폭행당하는 노동자들에게 나 자신을 동일시한다. 이미 오래전부터 나는 세종호텔 해고 노동자들의 싸움에 연대해 왔다. 특히 고진수 지부장이 구조물 위에 올라가 있던 동안, 나는 동료 신부들과 수도자들, 신자들과 함께 매주 월요일 그 아래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이 연대가 투쟁의 결과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윤리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의미는 분명하다. 우리의 연대는 해고 노동자들에게 “당신들의 복직 요구는 정당하다. 좌절하지 말고 함께 가자”는 메시지를 전한다.   이 싸움은 세종호텔 노동자들만의 복직 투쟁이 아니다. 오늘날 노동자는 쓰다 버려지는 소모품 취급을 받고 있다. 경영상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왜 노동자만 희생해야 하는가. 심지어 방만한 경영의 책임마저 노동자에게 전가된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정리해고는 사용자들에게 위기 탈출의 수단이 되었고, 그 결과 수많은 노동자들이 미래를 꿈꾸지 못한 채 고통 속에서 살아가거나 서서히 죽어갔다. 쌍용자동차 정리해고가 이를 증명한다. 그래서 우리는 “해고는 살인이다”라고 외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 자동화와 AI 확산으로 밀려날 노동자들까지 포함하면 이 싸움은 바로 우리 자신의 문제다.   인생의 성숙함은 나이나 학식에 비례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지탱하는 힘을 재산, 지위, 능력 같은 외부에서 찾는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을 받쳐주는 힘이 아니라 타인을 지배하기 위해 사용하는 힘이다. 내부로부터 힘을 얻지 못한 사람의 권력은 쉽게 폭력이 된다. 반면 내부로부터 힘을 얻은 사람은 자신의 약함을 드러낼 수 있고, 타인의 경계를 존중하며 고통에 공감한다. 산티아고 순례자들이 자주 말한다. “완주하려면 버리고 가야 한다”고. “죽으면 두고 갈 것을 왜 그렇게 많이 가지려 하는가.” 이 말은 지금 세종호텔 소유주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Fr.김정대(천주교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
혼자의 목소리가 부족할 때, 기꺼이 내 손을 잡아주는 사람들
‘노동자가 주체가 되어 자주적으로 단결하여 근로조건의 유지·개선, 기타 노동자의 경제적·사회적 지위 향상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조직하는 단체 또는 그 연합단체.’   노동조합의 사전적 정의는 위와 같습니다. 이 정의대로라면 노동조합은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활동하는, 마땅히 존중과 지지를 받아야 할 단체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노동조합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은 사뭇 다른 듯합니다. 누군가 노동조합 활동을 한다고 하면 의아하게 바라보거나, "왜 그런 일을 하느냐"고 묻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 안에 노동조합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크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파업으로 시민들에게 불편을 주고, 늘 싸움만 하는 단체라는 인식이 강합니다.   그들이 왜 파업이라는 힘겨운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외치고 왜 투쟁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일까요?   저는 노동사목위원회에 입사하여 연대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업무를 통해 노동조합원들을 만나는 일이 많았는데 콜트콜텍, 아시아나케이오, 세종호텔 등 여러 농성장을 방문했습니다. 그곳의 노동자들은 대부분 부당해고를 당한 분들이었고, 억울함을 호소하며 다시 일터로 복직하기 위해 오랜 세월 거리에서 투쟁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투쟁의 성과로 해결되는 사안들도 있었지만, 여전히 노동자를 이익의 도구로만 여기는 일터에서의 부당한 일들은 반복되고 있었고, 그만큼 연대가 필요한 현장도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이런 연대의 현장에서 자주 만나는 분들이 바로 노동조합원들입니다. 조합원들은 함께 연대하며 사측과 대화를 이어갈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고, 사측의 대응이 없을 때는 함께 투쟁 계획을 세웁니다. 또한 억울한 사연을 세상에 알려 더 많은 시민이 관심을 가지고 연대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거대한 힘을 가진 사측에 맞서 노동자 개인이 권리를 주장하고 문제를 해결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이 서로의 곁을 지키며 함께 버틸 수 있도록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줍니다.   노동조합의 주된 역할은 사전적 의미처럼 근로조건을 유지·개선하고 노동자의 경제적·사회적 지위를 향상해 양질의 노동환경을 만드는 것입니다. 모든 노동자가 더 좋은 환경에서 정당한 조건으로 일할 수 있도록 단결하여 목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그러다 억울한 일이 발생하면 파업이나 투쟁을 통해 정당한 권리를 되찾아오기도 합니다.   과거에 ‘노사관계’ 관련 교육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교육생 대다수는 각 사업장의 노조 간부나 조합원들로, 노동자를 대표해 사측과 협상을 진행하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들과 소통하며 제가 직접 경험해 보지 못했던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사측과 노동조건을 협상하는 실습 시간 중, 사측의 요구에 정당한 요구를 제시하거나 반론을 펴는 데 서툴렀던 저와는 달리, 노동조합원들은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노동자의 입장과 당연한 권리에 대해 노련하게 대변하고 있었습니다.   노동조합원들이 사측과 치열하게 협상하는 모습이 단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두의 노동환경이 반드시 개선되어야 한다는 신념과 사명감이 느껴졌습니다.   제가 처음 일했던 회사에도 노동조합이 있었지만, 당시 저는 그들의 역할에 무관심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당연하게 누렸던 복지와 개선된 노동환경은 저를 대신해 목소리를 냈던 이들의 끊임없는 협상 결과였을 것입니다.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말합니다. “남의 일이 아닙니다. 당신의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귀 기울여 주세요.” 이는 누군가에게 불행이 닥치길 바라는 저주 섞인 마음이 아닙니다. 본인들도 뉴스에서나 보던 일이 자신에게 일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입니다. 일터에서의 억울한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으며, 어느 누구도 자신만은 예외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일터에서 겪는 부당한 일은 그것이 내 일이든 남의 일이든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지 않으면 우리가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를 어느새 빼앗길 수 있습니다. 타인이 항상 나를 대변해 줄 수는 없습니다. 변화를 원한다면 자신의 작은 목소리라도 내야 합니다. 혼자의 목소리로 부족하다면 다른 이들과 손을 잡고 함께 외치면 됩니다. 변화는 그렇게 시작됩니다.   파업과 거리 투쟁으로 인해 일시적인 불편함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불편함을 무릅쓰고 거리에 나서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차별받지 않고 정당한 권리를 누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평온한 일상 역시, 앞선 세대 수많은 노동자가 목소리를 높여 쟁취한 결과물입니다.   노동조합은 단순히 싸우기 위한 단체가 아닙니다. 노동하는 우리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기꺼이 불편함을 감수하며 우리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조직입니다. 노동조합을 향한 우리의 시선이 차가운 눈총이 아닌, 지지와 응원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마태오
우리가 잃어버린 부끄러움
오래 전, 한 아이가 제게 귓속말로 들려준 속삭임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려 합니다. 몇 년 전이었을까요. 성당 마당에서 아이들과 어울려 놀다 잠시 화단에 걸터앉아 쉬고 있을 때였습니다. 유치부 아이 하나가 다가오더니 재잘재잘 제게 자신의 세상을 들려주기 시작했습니다. "신부님, 친구 누구는요, 뭐를 좋아하는데요, 저는요 뭐가 좋고요~."  그다지 특별할 내용이 없는 아이의 일상 이야기었고, 저는 가벼운 산책을 하듯 편안하게 그 아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무슨 비밀이라도 말하려는 듯 제게 바짝 다가와 속삭였습니다. "그런데요 신부님, 우리 집은요, 쪼그매서요, 방이 한 개예요."  순간 제 마음의 가볍던 발걸음이 덜컥 멈추어섰습니다. 어디를 향해 발걸음을 마저 이어가야 할지, 난감한 길목에 와버린 기분이었지요. 아이가 자신의 집을 부끄러워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어떤 대답을 해주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이 곤혹스러움이 표현될 겨를도 없이 아이는 마저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그래서요, 잠도 엄마랑 아빠랑 다 같이 잘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 자신의 세상을 들려주는 것만으로도 아이에게 고마울 따름이었는데, 더더욱 고맙게도 아이는 어찌할 바 몰라하는 제게 전혀 예상치 못했던 선물을 들려주었습니다. 아이의 속삭임은 세상 따뜻한 사랑을 담고 있었던 것이었죠. 평수의 부끄러움이 아니고 말입니다. 아이의 속삭이던 그 목소리가 잔향이 되어 묻습니다. 저는 왜 그 순간 곤혹스러웠던 것일까요? 아이가 자신의 좁은 집을 부끄럽게 여겼을 거라 생각한 제 무의식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그러곤 자문해보게 됩니다. 우리 어른들은 그동안 무엇을 부끄러워하며 살아오고 있었던 것일까요. 달동네, 반지하, 임대주택, 다 닳아 떨어진 운동화, 구멍 난 양말, 땀투성이의 작업복. 물질적 궁핍함이 묻어나는 거주지, 변변찮은 차림새, 땀흘리는 직업 등은 부끄러움이 되곤 했습니다. 마음대로 가누지 못하는 몸, 또렷하게 발음되지 않는 말, 좀 더 제한된 인지력. 장애라는 이름의 신체적 혹은 지적인 다름 등도 부끄러운 것으로 여겨지곤 했습니다. 애환이 진하게 배어나는 우리네 삶은 그렇게 그 자체로 가난을 상징하는 것이 되었고, 어째서인지 영문도 모른 채 우리 어른들에 의해 부끄러움의 대상이 되어버리곤 말았습니다. 이 부끄러운 '부끄러움'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우리가 참으로 부끄러움이라고 해야 할 것은 저 가난이 아니겠습니다. 작은 집, 허름한 옷, 짧은 가방끈, 신체적 어려움, 고달픈 노동 등 우리에게 부끄러움이 되어야 할 것은 이와 같은 것들이 아니라 가난이라는 단어로 대변되는 삶을 한낱 부끄러움으로 여기게 하는 우리의 '그 무엇'일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 무엇'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해 나가야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무엇이 참으로 우리의 부끄러움인지를 잃어버린 채, 한없이 부끄러운 삶만을 살다가 부지불식간에 하느님의 공의를 만날 수밖에 없게 되겠지요. 한 아이의 선물과도 같았던 수 년 전 속삭임으로부터 오늘을 거듭 성찰해봅니다. 지금 나의 삶은 정녕 무엇을 부끄러움으로 여기며, 또 무엇을 참 행복으로 여기고 있습니까? "많은 노동자가 하수도를 청소하는 것이 더는 부끄러움이 아니고, 다만 우리의 그 벗들이 쓰레기와 오물을 치우도록 하수도를 채우는 것이 부끄러움이겠다. 또 흔하디흔한 신발을 신고 손님으로 가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자기 구두를 보호하느라 구두 위에 방수용 장화까지 겹쳐 신고 맨발인 사람들을 지나쳐 가는 것이 부끄러움이겠다. 프랑스어나 새로운 소설을 모르는 것이 부끄러움이 아니고, 자신들의 빵이 어떠한 수고를 거쳐 준비되는지도 모르고 빵을 먹는 것이 부끄러움이겠다. ... (노동의 흔적인) 더러운 손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부끄러움이 아니고, 양손에 (노동의) 굳은 살이 없는 것이 부끄러움이겠다." - 톨스토이의 "What Shall We Do?" 중 일부 번역
Fr.비오
아름다움을 만드는 사람들
 늦은 밤 집에 들어가는 길은 늘 어지럽게 던져진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쓰레기통은 이미 배부르다고 먹은 것을 토해내고 있고, 쓰임을 다한 상자들은 여기저기 상처를 입은 채 나뒹굴어 있습니다. 비나 눈이라도 오는 날이면 지하철 입구는 질척질척 젖어있고 사람 손이 많이 닿은 이곳저곳은 그 특유의 자국을 새기고 있습니다. 수고롭게 하루를 살아온 사람들의 흔적들을 그대로 간직한 채 밤은 그 모든 것을 끌어안습니다.     그런데 밤사이 기적이 일어납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새벽은 새로운 도시의 얼굴을 보이고 있습니다. 반짝반짝 빛나는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의 손잡이, 텅 비어 무엇이든 소화할 수 있다는 쓰레기통, 깨끗한 거리...... 길거리만 이처럼 새로운 아침을 맞는 것이 아니라 아파트 계단, 학교의 강의실, 관공서의 현관, 어디든 발을 처음 딛는 아침은 정갈하고 깨끗하고 산뜻함으로 우리를 맞아줍니다. 마치 소복이 쌓인 눈에 첫발자국을 내듯이......     이 기적은 누가 이룬 것일까? 이 보이지 않는 손은 누구의 손일까? 고마운 마음도 잠시 또다시 일상에 빠져버리지만, 이 도시를 반짝이게 만드는 신비의 손이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 신비의 손을 가진 아름다운 사람들은 늘 숨어있는 사람들입니다.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 우리가 일하는 시간에는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우리가 안식의 자리에 들면 홀연 등장하여 이 도시를 깨끗하게 만들고는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언젠가부터 이 신비인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청소 노동자의 이름으로, 학교비정규직 노동자의 이름으로, 하청노동자의 이름으로, 6411버스의 첫차를 타는 사람들의 이름으로 그동안 음지에서 일하는 수고의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억울함이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어려운 자리에 있던 것만큼이나 가장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음이 그제야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아하 이분들이었구나! 이분들이 도시를 매일 목욕시켜주는 분들이었구나! 그런데 이분들의 처지는 열악하기만 합니다. 이들의 쉼터 또한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구석쟁이 골방이고 그나마도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합니다. 이 귀한 사람들이 그토록 천대받아왔던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왜 이 귀한 분들을 보이지 않는 사람 취급을 하였을까? 이분들 없이는 단 하루도 말끔한 얼굴을 보이지 못하는 주제에 무엇을 믿고 그리 당당하게도 사람을 함부로 부려왔을까? 하느님 보시기에도, 인간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기에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고 보면 저에게도 근본적인 차별이라는 것이 깊게 담겨있었습니다. 배우지 못한 사람, 가난한 사람, 버려진 사람으로 의식 저 너머에 새겨져 있던 분들이었습니다.     이제 아름다운 사람들이 그 모습 그대로 드러났으면 좋겠습니다. 이 아름답고 깨끗한 도시를 누가 만들었는지를 물었을 때 서슴없이 손을 들어 가리켜 그 위대한 업적에 대하여 고마움을 노래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시민들이 모두 고마움을 드러낸다면 이분들을 하찮게 여기고 마구 부리는 사람들도 이분들이 하시는 일에 대해 알맞은 대우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용역에 용역을 더하는 하청의 구조도 끊을 수 있을 것입니다. 회사나 정부의 중요하고 귀하다 하는 자리에 하청에 재하청을 도입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생각을 나누다’에도 매번 이분들이 드러나는 이야기를 연재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Fr.나승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