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목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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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더 세종호텔을 사랑하는 걸까?
 지난해 12월, 대법원은 세종호텔 노동자들의 정리해고에 대해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인정된다며 해고가 정당하다는 최종 판결을 내렸습니다. 사측이 특정 노조 조합원만을 해고 대상으로 선정했음에도, 법원은 이 역시 정당하다고 보았습니다. 코로나19 시기의 경영 악화를 빌미로 특정 노동조합 조합원을 골라 해고한 이유를 살피지 못한 것은 법조차도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인 ‘노조할 권리’를 끝내 보장해 주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고진수 세종호텔지부장은 호텔 앞 도로 교통시설물에 올라 고공농성에 돌입했습니다. 대법원 판결이라는 사법적 판단이 내려졌음에도, 왜 세종호텔 해고자들이 고공농성이라는 최후의 수단을 선택하며 다시금 사회적 판단을 구하고 있는지 헤아려 볼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침 선전전에 참여하며 조합원들에게 들었던 얘기를 떠올려 보자면, 호텔 업무의 외주화는 이미 오래전부터 진행되어 왔다고 합니다. 객실 정비, 청소, 경비, 주차 등 업무를 쪼개어 용역업체에 맡기는 ‘아웃소싱’은 비용 절감과 인력 운영의 유연성을 내세운 소위 ‘효율적 경영’의 산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용자는 이를 이익을 위한 경영이라 말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노동조건 악화와 불안정한 일자리를 전전해야 하는 고통은 온전히 노동자의 몫입니다. 현장에서 더 나은 일터를 만들기 위해 노동조건을 개선해나가는 것은 노동조합의 당연한 역할이지만, 이러한 활동이 사용자가 노동조합을 멀리하고 싶어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용역업체로 쪼개어진 관리가 과연 만족스러운 서비스 품질을 유지할 수 있을지, 세종호텔이 그간 쌓아온 브랜드 이미지는 어떻게 될지 의문을 품게 됩니다.  어느덧 사계절을 지나 다시 겨울이 되었고, 고공농성은 300일을 넘겼지만 고진수 지부장은 여전히 땅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 12월 16일에 열린 5차 교섭에서 사측은 노조가 제시한 ‘순차적 복직’이라는 양보안마저도 무시했습니다. 오히려 AI를 기반으로 호텔을 운영할 거라며 지금도 직원이 많다는 말만 되풀이했다고 합니다. ‘AI’이라는 말로 포장된 ‘탐욕’을 봅니다. 반면, 자신이 일하던 호텔의 서비스가 나빠져 손님이 줄어들까 노심초사하는 노동자들의 마음을 통해서는 일터가 단순히 생계만을 위한 곳이 아님을 보게됩니다. 함께 모여 일하고 싶은 복직의 마음과 땀 흘려 일하던 일터에서 다시금 보람을 찾고 싶어 하는 마음은 어쩌면 노동의 본연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일 것입니다.  내 일터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이 있기에 이 투쟁을 멈출 수가 없는가 봅니다. 손님에게 정성껏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객실을 깨끗이 청소하며, 기쁘게 손님을 맞이하고 싶다는 호텔 노동자들의 바람. 이런 마음이 진정으로 호텔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닐까요!
베로니카
우리가 잃어버린 부끄러움
오래 전, 한 아이가 제게 귓속말로 들려준 속삭임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려 합니다. 몇 년 전이었을까요. 성당 마당에서 아이들과 어울려 놀다 잠시 화단에 걸터앉아 쉬고 있을 때였습니다. 유치부 아이 하나가 다가오더니 재잘재잘 제게 자신의 세상을 들려주기 시작했습니다. "신부님, 친구 누구는요, 뭐를 좋아하는데요, 저는요 뭐가 좋고요~."  그다지 특별할 내용이 없는 아이의 일상 이야기었고, 저는 가벼운 산책을 하듯 편안하게 그 아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무슨 비밀이라도 말하려는 듯 제게 바짝 다가와 속삭였습니다. "그런데요 신부님, 우리 집은요, 쪼그매서요, 방이 한 개예요."  순간 제 마음의 가볍던 발걸음이 덜컥 멈추어섰습니다. 어디를 향해 발걸음을 마저 이어가야 할지, 난감한 길목에 와버린 기분이었지요. 아이가 자신의 집을 부끄러워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어떤 대답을 해주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이 곤혹스러움이 표현될 겨를도 없이 아이는 마저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그래서요, 잠도 엄마랑 아빠랑 다 같이 잘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 자신의 세상을 들려주는 것만으로도 아이에게 고마울 따름이었는데, 더더욱 고맙게도 아이는 어찌할 바 몰라하는 제게 전혀 예상치 못했던 선물을 들려주었습니다. 아이의 속삭임은 세상 따뜻한 사랑을 담고 있었던 것이었죠. 평수의 부끄러움이 아니고 말입니다. 아이의 속삭이던 그 목소리가 잔향이 되어 묻습니다. 저는 왜 그 순간 곤혹스러웠던 것일까요? 아이가 자신의 좁은 집을 부끄럽게 여겼을 거라 생각한 제 무의식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그러곤 자문해보게 됩니다. 우리 어른들은 그동안 무엇을 부끄러워하며 살아오고 있었던 것일까요. 달동네, 반지하, 임대주택, 다 닳아 떨어진 운동화, 구멍 난 양말, 땀투성이의 작업복. 물질적 궁핍함이 묻어나는 거주지, 변변찮은 차림새, 땀흘리는 직업 등은 부끄러움이 되곤 했습니다. 마음대로 가누지 못하는 몸, 또렷하게 발음되지 않는 말, 좀 더 제한된 인지력. 장애라는 이름의 신체적 혹은 지적인 다름 등도 부끄러운 것으로 여겨지곤 했습니다. 애환이 진하게 배어나는 우리네 삶은 그렇게 그 자체로 가난을 상징하는 것이 되었고, 어째서인지 영문도 모른 채 우리 어른들에 의해 부끄러움의 대상이 되어버리곤 말았습니다. 이 부끄러운 '부끄러움'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우리가 참으로 부끄러움이라고 해야 할 것은 저 가난이 아니겠습니다. 작은 집, 허름한 옷, 짧은 가방끈, 신체적 어려움, 고달픈 노동 등 우리에게 부끄러움이 되어야 할 것은 이와 같은 것들이 아니라 가난이라는 단어로 대변되는 삶을 한낱 부끄러움으로 여기게 하는 우리의 '그 무엇'일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 무엇'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해 나가야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무엇이 참으로 우리의 부끄러움인지를 잃어버린 채, 한없이 부끄러운 삶만을 살다가 부지불식간에 하느님의 공의를 만날 수밖에 없게 되겠지요. 한 아이의 선물과도 같았던 수 년 전 속삭임으로부터 오늘을 거듭 성찰해봅니다. 지금 나의 삶은 정녕 무엇을 부끄러움으로 여기며, 또 무엇을 참 행복으로 여기고 있습니까? "많은 노동자가 하수도를 청소하는 것이 더는 부끄러움이 아니고, 다만 우리의 그 벗들이 쓰레기와 오물을 치우도록 하수도를 채우는 것이 부끄러움이겠다. 또 흔하디흔한 신발을 신고 손님으로 가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자기 구두를 보호하느라 구두 위에 방수용 장화까지 겹쳐 신고 맨발인 사람들을 지나쳐 가는 것이 부끄러움이겠다. 프랑스어나 새로운 소설을 모르는 것이 부끄러움이 아니고, 자신들의 빵이 어떠한 수고를 거쳐 준비되는지도 모르고 빵을 먹는 것이 부끄러움이겠다. ... (노동의 흔적인) 더러운 손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부끄러움이 아니고, 양손에 (노동의) 굳은 살이 없는 것이 부끄러움이겠다." - 톨스토이의 "What Shall We Do?" 중 일부 번역
Fr.비오
마음 속, 뒤엉킨 聖俗
무분별한 자본주의의 폭력에 저항하는 마음과 일확천금 횡재에 부러움으로 뇌동하는 마음은 내 안에 얼마큼이나 하나일 수 있는 마음일까? 단장지애의 희생에 연대하여 분투하는 마음과 안위에 있어 편안함을 주는 것을 찾는 마음은.. 내 안에 얼마큼이나 함께일 수 있는 마음일까?  
Fr.비오
아름다움을 만드는 사람들
 늦은 밤 집에 들어가는 길은 늘 어지럽게 던져진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쓰레기통은 이미 배부르다고 먹은 것을 토해내고 있고, 쓰임을 다한 상자들은 여기저기 상처를 입은 채 나뒹굴어 있습니다. 비나 눈이라도 오는 날이면 지하철 입구는 질척질척 젖어있고 사람 손이 많이 닿은 이곳저곳은 그 특유의 자국을 새기고 있습니다. 수고롭게 하루를 살아온 사람들의 흔적들을 그대로 간직한 채 밤은 그 모든 것을 끌어안습니다.     그런데 밤사이 기적이 일어납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새벽은 새로운 도시의 얼굴을 보이고 있습니다. 반짝반짝 빛나는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의 손잡이, 텅 비어 무엇이든 소화할 수 있다는 쓰레기통, 깨끗한 거리...... 길거리만 이처럼 새로운 아침을 맞는 것이 아니라 아파트 계단, 학교의 강의실, 관공서의 현관, 어디든 발을 처음 딛는 아침은 정갈하고 깨끗하고 산뜻함으로 우리를 맞아줍니다. 마치 소복이 쌓인 눈에 첫발자국을 내듯이......     이 기적은 누가 이룬 것일까? 이 보이지 않는 손은 누구의 손일까? 고마운 마음도 잠시 또다시 일상에 빠져버리지만, 이 도시를 반짝이게 만드는 신비의 손이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 신비의 손을 가진 아름다운 사람들은 늘 숨어있는 사람들입니다.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 우리가 일하는 시간에는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우리가 안식의 자리에 들면 홀연 등장하여 이 도시를 깨끗하게 만들고는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언젠가부터 이 신비인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청소 노동자의 이름으로, 학교비정규직 노동자의 이름으로, 하청노동자의 이름으로, 6411버스의 첫차를 타는 사람들의 이름으로 그동안 음지에서 일하는 수고의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억울함이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어려운 자리에 있던 것만큼이나 가장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음이 그제야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아하 이분들이었구나! 이분들이 도시를 매일 목욕시켜주는 분들이었구나! 그런데 이분들의 처지는 열악하기만 합니다. 이들의 쉼터 또한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구석쟁이 골방이고 그나마도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합니다. 이 귀한 사람들이 그토록 천대받아왔던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왜 이 귀한 분들을 보이지 않는 사람 취급을 하였을까? 이분들 없이는 단 하루도 말끔한 얼굴을 보이지 못하는 주제에 무엇을 믿고 그리 당당하게도 사람을 함부로 부려왔을까? 하느님 보시기에도, 인간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기에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고 보면 저에게도 근본적인 차별이라는 것이 깊게 담겨있었습니다. 배우지 못한 사람, 가난한 사람, 버려진 사람으로 의식 저 너머에 새겨져 있던 분들이었습니다.     이제 아름다운 사람들이 그 모습 그대로 드러났으면 좋겠습니다. 이 아름답고 깨끗한 도시를 누가 만들었는지를 물었을 때 서슴없이 손을 들어 가리켜 그 위대한 업적에 대하여 고마움을 노래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시민들이 모두 고마움을 드러낸다면 이분들을 하찮게 여기고 마구 부리는 사람들도 이분들이 하시는 일에 대해 알맞은 대우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용역에 용역을 더하는 하청의 구조도 끊을 수 있을 것입니다. 회사나 정부의 중요하고 귀하다 하는 자리에 하청에 재하청을 도입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생각을 나누다’에도 매번 이분들이 드러나는 이야기를 연재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Fr.나승구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전례력으로 한 해가 지나갔습니다. 벽에 붙은 한 장 남은 달력은 올해가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고 알려주네요.   돌아보면 좋았던 날들도, 힘든 날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좋았던 날들보다 힘든 날이 더 많았다고 느끼는 것은 저만일까요.   사실 좋았던 일들은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힘들었던 일들이, 날들이 훨씬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 크고 작은 힘든 일들을 겪어 내었고, 이겨 내었고, 지금도 이겨내며 한 해가 지나가고 있네요.   그나저나 나는 그렇게 힘들다고 했던 일들을 날들을 어떻게 조금이라도 이겨내고 견디어 내었지? 생각해보니 그때마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고,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이 있었네요.   그러고 보면 힘든 일들은, 힘든 날들은 감사한 일과 감사한 날들과 만나는 것 같습니다.   결국 다 감사한 일들이고 감사한 날들이었네요. 한 해 동안 보살펴 주신 주님과, 부족한 나를 위해 애써주신 분들과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신 모든 분, 그리고 모든 날,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1테살 5,18)   P.S 이제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벌써부터 들뜨는 내 마음을 저도 어쩔 수 없네요. 예수님 오시니 얼마나 기쁘고 좋은 일인지요.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휘황찬란한 불빛과 거리마다 크게 울려 퍼지는 캐롤송 사이로 눈물과 고통 속에 도움 하나 받지 못하고 아기를 낳고, 제대로 된 이불 하나 덮지 못하고 뻣뻣한 지푸라기 위에서 마구간 속 입김으로 몸을 덥히고 생글생글 웃고 있는, 그런 아기를 글썽이는 두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젊디젊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손창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