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목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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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홀로 ‘사장’도 아닌데... 3.3에 숨겨진 현실
달력을 보면 3월 3일을 납세자의 날로 기념합니다. 그리고 ‘삼겹살 Day’라며 재치있는 소비 촉진에 이용하기도 합니다. 한편, 3월 3일을 ‘가짜 3.3 노동자의 날’로 기념하는 행사도 있습니다. 올해로 5회째를 맞는 그 기념식에 다녀왔습니다.   가짜 3.3 노동자의 날 기념식은 근로기준법의 적용도 받지 못하고, 스스로 노동자인지 개인 사업자인지 혼란스러워해야 하는 부당한 노동 현실을 바로잡으려는 이들이 내딛는 발자국입니다. 기념식은 해마다 ‘최악의 기업’과 ‘모범 판정’을 발표하며, 노동자의 권리 찾기를 돕는 법률·언론 단체와 활동가, 그리고 불의한 일터를 개선해 온 당사자들에게 격려의 상을 수여합니다.   사회자의 시작 말씀 중에 “김 매니저”, “김 프로”, “김 기사”, “김 선생”, “김 팀장”, “김 작가”, “김 사장”, “김 씨”, 혹은 그냥 “아저씨”, “아줌마” …로 불리는 우리 시대 프리랜서들의 다양한 호칭을 통해 노동 현실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일명 ‘프리랜서’ 그리고 5인 미만 소규모 사업장에서 편법으로 악용하는 방식이 이제는 플랫폼 기반의 다양한 업종으로 확장되며 ‘3.3 천만 시대’에 이르고 있습니다. 학원 강사, 배달 라이더는 물론 편의점과 식당의 청년 아르바이트생, 심지어 대규모 물류센터의 일용직 노동자들에게까지 ‘효율적인 노무관리 전략’이라 선전하며 활용되고 있습니다.   ‘가짜 3.3 노동자’란 노동자라면 임금에 대한 근로소득세를 내야 함에도 사업주가 4대 보험 납부와 노동법 적용 등을 회피하기 위해 사업소득세(3.3%)를 내도록 계약을 체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에 따른 사업주의 책임은 줄어들고 노동자의 권리는 사라집니다. 이처럼 법의 사각지대를 악용하는 '가짜 3.3' 수법은 이제 특정 직종을 넘어 우리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었습니다.   7년 가까이 노동자의 잃어버린 이름을 되찾기 위해 활동해 온 ‘권리찾기유니온’은 2024년 쿠팡 물류센터 노동자들의 산재·고용보험 미가입 문제에 있어 전례가 없을 정도의 대규모 적발을 통해 ‘가짜 3.3’으로 위장하여 고용보험 등에 미가입하는 사례가 심각함을 알렸으며, 이를 계기로 고용노동부의 근로감독과 전수 조사가 이뤄졌습니다. 이러한 성과는 근로기준법 일부 개정으로 이어졌고, 지난해 10월, 국세청의 소득세 신고 내역을 노동부가 제공받을 수 있도록 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제102조의2)이 시행되면서, '유령'처럼 존재했던 ‘가짜 3.3 노동자’들의 실체를 파악하고 노동법의 울타리 안으로 불러들일 수 있는 본격적인 길이 열렸습니다.   작은 사업장이나 프리랜서로 일하는 모든 이의 요구는 소박합니다. 아니, 너무나 상식적인 것입니다. 일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기본법인 근로기준법에서 차별받지 않고, 자신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임금을 받으며, 안전하게 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행사 말미에 노동자와 사회단체들의 논의로 모아낸 ‘근로기준법과 노동법 없이 일하는 노동자 권리 찾기’를 올해의 공동 활동으로 제안하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또한 권리찾기유니온은 앞으로도 3.3 제보센터를 통해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모으고, 법률 구제와 사회적 연대를 통한 활동을 이어 나갈 것이라 밝혔습니다.   3월의 꽃샘추위로 다소 추웠던 거리 기념식이었지만, 마지막 결의마당의 ‘상징 행동 33자 피켓’을 들고 선 순간은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침묵하지 않고, 혼자라면 어려웠을 테지만 함께하는 이들이 있어서 가능했던 시간이었기에 어느새 제 마음이 훈훈해졌습니다.
베로니카
안녕하세요?
솔렌지아
정말 괜찮은가요? ‘야간노동’
11시가 가까운 늦은 저녁 집 앞 편의점에 들렀습니다. 카운터에 계신 분이 마치 아는 사이처럼 반갑게 인사했습니다. “안녕하세요! 늦으셨네요.” 분명 편의점 사장님은 아닌데, 누구신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아 어색하게 목례만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기억에 잊혔다가 동네 안경점에 가서야 안경점 사장님이 편의점 카운터에 계셨던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니, 왜 편의점에 계셨냐고 여쭈었더니 아이들 학원비라도 벌려고 지난해 가을부터 일주일에 2일 밤새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있고, 운영하는 안경점도 주 6일 영업을 그대로 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안경점과 편의점 모두 손님이 없어 대기하는 시간이 길지만 육체적으로 무리가 되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습니다.   요즘 자영업자들이 어렵다는 얘기는 익히 들었지만 이렇게 투잡(겸업), 그것도 야간노동을 하고 계신다니 가장의 무게가 새삼 짐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장님은 힘들지 않다고, 할만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애써 그리 말씀하시는 것이리라 생각되었지만 딱히 뭐라 드릴 말씀이 떠오르지 않아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 마시라는 인사를 남기고 매장을 나왔습니다.   이제 밤낮을 바꿔 일하는 일상은 더 이상 낯설지 않습니다. 보건·의료, 방송·통신, 제조·물류는 물론 편의점까지 2·3교대의 밤샘 노동은 우리 사회 곳곳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임시직 인턴 연구원으로 일하는 제 아들마저 프로젝트 마감을 앞두고 밤샘 작업 후 몰아 자는 일이 잦아져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걱정하는 부모에게 아들은 괜찮다고만 합니다.   지금은 괜찮은 것만 같은 그 야간노동이 지속되면 암을 유발할 만큼 위험하다는 사실은 아직 멀게만 느껴집니다. 당장의 생계와 좀 더 많은 소득을 위해 또는 집약적인 성과나 결과물을 내놓기 위해 오늘도 많은 이들이 밤을 새워가며 일하도록 내몰리고 있습니다.   얼마 전 쿠팡 사태로 불거진 ‘새벽 배송’이 논란이 되며 대형마트의 심야영업과 온라인 주문·배송을 제한하는 ‘새벽 배송 금지’ 규제를 완화하는 입법이 추진되고 있다는 보도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니, 주말·심야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휴식권을 보장하기 위해 도입된 사회적 장치가 다시 대형마트를 비롯한 관련 업계 종사자들의 ‘야간노동’을 늘리는 방향으로 추진된다는 것이 우려스러웠습니다.   ‘새벽 배송’에 대하여 노동계는 '건강권'을 이유로 반대하고, 유통업계는 '생존권'을 내세우며 맞서는 상황입니다. 골목상권을 위협한다는 소상공인의 입장 그리고 ‘새벽 배송’에 익숙해진 소비자의 요구 등 법안을 만들어야 하는 정치권의 이해관계까지 얽히며 논란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보수 경제지에서는 일부 배송 기사들은 ‘새벽 배송 금지’를 반대한다는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얽힌 논란이 합의를 향한 공론의 장을 마련할 기회가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야간노동’과 ‘새벽 배송’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하는 우리 사회의 고단함을 먼저 바로 잡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투잡’이라도 해야 생활이 가능한 가장들과 장 볼 시간조차 없어 새벽 배송을 끊을 수 없는 우리들의 일상이 바뀌지 않는다면 누군가의 ‘야간노동’은 멈출 수 없을 것입니다.
베로니카
말의 이기심
솔렌지아
'모든 사람들의 희년’을 꿈꾸며
비행기를 타고 가는 여행이라곤 제주도뿐이었던 저는 작년 12월 큰 도전을 했습니다. 2025년 자비의 희년에 떠나는 생애 첫 이탈리아 여행. 이 여정은 저에게 평생 잊지 못할 풍경들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로마의 고풍스러운 골목을 걷고, 화면으로만 보던 거장들의 작품과 바티칸 박물관의 예술품을 실제로 마주했을 때의 감동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이번 여행은 가톨릭교회가 선포한 ‘희년’이라는 특별한 시기에 이루어져 의미가 더 깊었습니다. 여행 메이트가 신부님이었던 것과, 현재 로마에서 사목 중인 본당 시절의 인연인 신부님을 만나 뵐 수 있었던 것 역시 큰 축복이었습니다. 신부님들은 성지 구석구석을 안내하며 역사와 신앙의 유래를 상세히 설명해 주셨고, 함께 미사를 봉헌하며 관광만이 아니라 순례자로서 은총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웅장한 대성당의 제대 앞에서 기도를 바치던 그 순간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하지만 긴 여행을 마치던 마지막 날, 로마에서 유학 중인 한 청년과 신부님들이 함께한 식사 자리는 이번 여행을 되돌아보며 성찰의 시간을 갖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유학 생활 중에도 틈틈이 수녀님들과 노숙인 봉사를 해왔다는 그 청년은, 제가 미처 보지 못했던 희년의 이면을 담담히 들려주었습니다.   “사실 이곳의 가난한 이들은 희년을 싫어합니다.”     자비와 용서의 해인 희년을 정작 가장 가난한 이들이 기피한다는 말이 먹먹하게 다가왔습니다. 희년을 맞아 몰려드는 순례자들을 위해 대대적인 도시 정비 사업이 벌어지면서, 거리에서 밤을 지새우던 이들은 머물던 삶의 터전에서 밀려나야 했습니다.     치솟는 물가 또한 그들을 괴롭혔습니다. 순례객들로 북적이는 도시는 생필품 가격마저 올려놓았고, 하루 한 끼가 간절한 이들에게 희년은 기쁨의 해가 아니라 생존을 위협받는 혹독한 시기가 된 것입니다. 무엇보다 생각이 깊어졌던 지점은 그들이 마주한 ‘장벽’이었습니다. 누구나 하느님의 자비를 입는다는 ‘희년의 문’을 통과하기 위해 늘어선 인파 속에서, 남루한 행색의 그들이 삼엄한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그들은 기피 대상이라는 이유로 희년의 은총 안에서조차 철저히 소외되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문득 지난해 노동사목위원회에서 진행했던 가톨릭청년교리모임 ‘울림’에서 보았던 영상 한 편을 떠올렸습니다. 과거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을 준비할 때, 도시 정비라는 명목으로 쪽방촌 등 빈민가를 허물고 이웃들을 강제로 몰아냈던 기록들이었습니다. 당시에도 세계적인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그리고 국가적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고 환경을 정비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삶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우리 이웃들의 눈물이 있었습니다. 이탈리아의 노숙인들이 겪는 현실은 그때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거룩한 해를 준비하는 것일까요? 외적인 정돈을 위해 정작 우리가 먼저 품어야 할 약한 이웃들을 밀어내는 것이 과연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모습일지 생각하게 됩니다. 희년의 목적과 취지를 알리기 위해 쏟는 에너지가 정작 그 안에 담겨야 할 ‘사람’을 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저 껍데기뿐인 형식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가톨릭의 희년은 하느님의 자비가 모든 이에게 차별 없이 드러나는 거룩한 해입니다. 진정한 자비는 웅장한 성당의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이 아니라, 그 문턱조차 넘지 못하는 이들의 손길 위에 머물러야 합니다.     “보통 사람들의 희년.”     이탈리아 노숙인들이 내뱉었다는 그 한마디는 이번 여행에서 저에게 가장 큰 울림으로 남았습니다. 그들에게 희년은 모든 이의 은총이 아닌, 준비된 특정인들만을 위한 시간으로 느껴졌던 것입니다. 우리는 희년의 화려함에 가려, 보지 못했던 낮은 곳의 목소리에 더 민감하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문을 통과하는 형식적인 절차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속에 소외된 이들을 향한 ‘자비의 문’을 먼저 여는 일입니다.     희년의 본래 의미를 기억하며, 앞으로 맞이할 모든 은총의 시기가 가난하고 외로운 이들이 먼저 초대받고 환대받는 진정한 기쁨의 장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해 봅니다. 웅장한 성전의 문보다 이웃을 향한 마음의 문을 먼저 여는 것, 그것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진정한 희년의 준비일 것입니다.
마태오
결국, 사람의 마음
Fr.시몬
해고 앞에 선 환대의 노동자들, 나는 왜 그들을 엄호하는가
세종호텔 해고자들이 지금 호텔 로비에 들어가서 진짜 사장 주명건 호텔 소유주가 협상에 직접 나오도록 요구하며 농성을 한 지 10여 일이 지났다. 나도 지난 1월 28일 저녁에 시간을 내서 투쟁 문화제에 함께 했다. 해고 노동자들은 코로나19 전염병 대확산으로 투숙객이 줄어들어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는다는 이유로 2021년 12월 10일에 해고되었다. 이들은 ‘부당해고 및 부당노동행위 구제 재심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2024년 12월 18일 대법원은 코로나19 경영 악화를 이유로 세종호텔이 노동자들을 해고한 것은 정당하다고 최종 판결했다.   해고 노동자들의 복직 요구는 이 판결로 끝나지 않았다. 2025년 2월에 고진수 지부장이 호텔 앞 도로 위 구조물에 올라가 코로나19 종식 이후 해외 관광객의 유입으로 호텔 영업이 어느 정도 정상화된 만큼 해고했던 노동자들을 복직시키라고 요구했고, 노동조합은 호텔 측과 협상을 끌어냈다. 그리고 그는 336일 만에 그 구조물에서 내려와 직접 협상에 들어갔다. 이후 노동자들은 호텔 로비를 점거하며 주명건 소유주가 협상에 직접 나올 것을 요구했다. 그가 결정권을 가진 실질적인 소유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텔 측과의 협상은 전혀 진전이 없는 상태다. 그리고 경찰은 2월 2일 호텔 로비에서 농성 중이던 조합원들과 연대 시민들을 연행했다.   오래전에 비정규노동자의 집 ‘꿀잠’에서 누군가를 위한 ‘꿀밥’ 나눔이 있었다. 나는 고진수 노동자를 그 ‘꿀밥’ 나눔에서 만났다. 나 역시 그 자리에 음식을 내놓고 있었고, 그도 일식을 요리하고 있었다. 우리는 손님을 환대한다는 마음으로 같은 주방을 나누어 썼던 경험을 공유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가 세종호텔 식당 주방에서 얼마나 기쁜 마음으로 손님들을 맞이했을지를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사실 호텔은 손님을 환대하는 공간이다. 그를 비롯한 다른 노동자들 역시 환대의 마음으로 그 자리를 지켜왔을 것이다. 그런 이들이 코로나19 대유행이라는 재난을 이유로 하루아침에 그 자리에서 쫓겨났다. 만약 재난이 이유였다면, 재난을 극복한 뒤 복직시키겠다는 약속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한 경영 악화는 노동조합 활동을 혐오하는 이들에게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사법 권력 또한 경영상의 이유를 들어 호텔 소유주의 손을 들어주었다. 해고 노동자들의 마음은 억울함과 분노로 물들었고, 그 감정은 다시 싸움을 시작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1년 전, 고진수 지부장은 쌀쌀한 날씨 속에서 도로 위 구조물에 올랐다.   내가 세종호텔 해고 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적 엄호’ 활동을 하는 이유는 그들의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깊이 공감했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생존권을 무시하고 쉽게 해고하는 행위는 안전한 삶의 경계를 짓밟는 폭력이다. 나는 법 해석보다 피해자가 느끼는 억울함과 분노 속에 더 많은 진실이 담겨 있다고 믿는다. 법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법 권력이 모호한 법 해석을 통해 기득권 유지의 도구로 작동했던 사례를 우리는 수없이 보아왔다.   2천 년 전 예수 역시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편에 서서 율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던 권력자들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래서 나는 잘났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무시당하고 폭행당하는 노동자들에게 나 자신을 동일시한다. 이미 오래전부터 나는 세종호텔 해고 노동자들의 싸움에 연대해 왔다. 특히 고진수 지부장이 구조물 위에 올라가 있던 동안, 나는 동료 신부들과 수도자들, 신자들과 함께 매주 월요일 그 아래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이 연대가 투쟁의 결과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윤리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의미는 분명하다. 우리의 연대는 해고 노동자들에게 “당신들의 복직 요구는 정당하다. 좌절하지 말고 함께 가자”는 메시지를 전한다.   이 싸움은 세종호텔 노동자들만의 복직 투쟁이 아니다. 오늘날 노동자는 쓰다 버려지는 소모품 취급을 받고 있다. 경영상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왜 노동자만 희생해야 하는가. 심지어 방만한 경영의 책임마저 노동자에게 전가된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정리해고는 사용자들에게 위기 탈출의 수단이 되었고, 그 결과 수많은 노동자들이 미래를 꿈꾸지 못한 채 고통 속에서 살아가거나 서서히 죽어갔다. 쌍용자동차 정리해고가 이를 증명한다. 그래서 우리는 “해고는 살인이다”라고 외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 자동화와 AI 확산으로 밀려날 노동자들까지 포함하면 이 싸움은 바로 우리 자신의 문제다.   인생의 성숙함은 나이나 학식에 비례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지탱하는 힘을 재산, 지위, 능력 같은 외부에서 찾는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을 받쳐주는 힘이 아니라 타인을 지배하기 위해 사용하는 힘이다. 내부로부터 힘을 얻지 못한 사람의 권력은 쉽게 폭력이 된다. 반면 내부로부터 힘을 얻은 사람은 자신의 약함을 드러낼 수 있고, 타인의 경계를 존중하며 고통에 공감한다. 산티아고 순례자들이 자주 말한다. “완주하려면 버리고 가야 한다”고. “죽으면 두고 갈 것을 왜 그렇게 많이 가지려 하는가.” 이 말은 지금 세종호텔 소유주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Fr.김정대(천주교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
너에게 주고 나에게 남는 것
Fr.시몬
말의 무게
솔렌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