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목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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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의 목소리가 부족할 때, 기꺼이 내 손을 잡아주는 사람들
‘노동자가 주체가 되어 자주적으로 단결하여 근로조건의 유지·개선, 기타 노동자의 경제적·사회적 지위 향상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조직하는 단체 또는 그 연합단체.’   노동조합의 사전적 정의는 위와 같습니다. 이 정의대로라면 노동조합은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활동하는, 마땅히 존중과 지지를 받아야 할 단체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노동조합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은 사뭇 다른 듯합니다. 누군가 노동조합 활동을 한다고 하면 의아하게 바라보거나, "왜 그런 일을 하느냐"고 묻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 안에 노동조합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크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파업으로 시민들에게 불편을 주고, 늘 싸움만 하는 단체라는 인식이 강합니다.   그들이 왜 파업이라는 힘겨운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외치고 왜 투쟁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일까요?   저는 노동사목위원회에 입사하여 연대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업무를 통해 노동조합원들을 만나는 일이 많았는데 콜트콜텍, 아시아나케이오, 세종호텔 등 여러 농성장을 방문했습니다. 그곳의 노동자들은 대부분 부당해고를 당한 분들이었고, 억울함을 호소하며 다시 일터로 복직하기 위해 오랜 세월 거리에서 투쟁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투쟁의 성과로 해결되는 사안들도 있었지만, 여전히 노동자를 이익의 도구로만 여기는 일터에서의 부당한 일들은 반복되고 있었고, 그만큼 연대가 필요한 현장도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이런 연대의 현장에서 자주 만나는 분들이 바로 노동조합원들입니다. 조합원들은 함께 연대하며 사측과 대화를 이어갈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고, 사측의 대응이 없을 때는 함께 투쟁 계획을 세웁니다. 또한 억울한 사연을 세상에 알려 더 많은 시민이 관심을 가지고 연대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거대한 힘을 가진 사측에 맞서 노동자 개인이 권리를 주장하고 문제를 해결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이 서로의 곁을 지키며 함께 버틸 수 있도록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줍니다.   노동조합의 주된 역할은 사전적 의미처럼 근로조건을 유지·개선하고 노동자의 경제적·사회적 지위를 향상해 양질의 노동환경을 만드는 것입니다. 모든 노동자가 더 좋은 환경에서 정당한 조건으로 일할 수 있도록 단결하여 목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그러다 억울한 일이 발생하면 파업이나 투쟁을 통해 정당한 권리를 되찾아오기도 합니다.   과거에 ‘노사관계’ 관련 교육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교육생 대다수는 각 사업장의 노조 간부나 조합원들로, 노동자를 대표해 사측과 협상을 진행하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들과 소통하며 제가 직접 경험해 보지 못했던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사측과 노동조건을 협상하는 실습 시간 중, 사측의 요구에 정당한 요구를 제시하거나 반론을 펴는 데 서툴렀던 저와는 달리, 노동조합원들은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노동자의 입장과 당연한 권리에 대해 노련하게 대변하고 있었습니다.   노동조합원들이 사측과 치열하게 협상하는 모습이 단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두의 노동환경이 반드시 개선되어야 한다는 신념과 사명감이 느껴졌습니다.   제가 처음 일했던 회사에도 노동조합이 있었지만, 당시 저는 그들의 역할에 무관심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당연하게 누렸던 복지와 개선된 노동환경은 저를 대신해 목소리를 냈던 이들의 끊임없는 협상 결과였을 것입니다.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말합니다. “남의 일이 아닙니다. 당신의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귀 기울여 주세요.” 이는 누군가에게 불행이 닥치길 바라는 저주 섞인 마음이 아닙니다. 본인들도 뉴스에서나 보던 일이 자신에게 일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입니다. 일터에서의 억울한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으며, 어느 누구도 자신만은 예외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일터에서 겪는 부당한 일은 그것이 내 일이든 남의 일이든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지 않으면 우리가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를 어느새 빼앗길 수 있습니다. 타인이 항상 나를 대변해 줄 수는 없습니다. 변화를 원한다면 자신의 작은 목소리라도 내야 합니다. 혼자의 목소리로 부족하다면 다른 이들과 손을 잡고 함께 외치면 됩니다. 변화는 그렇게 시작됩니다.   파업과 거리 투쟁으로 인해 일시적인 불편함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불편함을 무릅쓰고 거리에 나서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차별받지 않고 정당한 권리를 누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평온한 일상 역시, 앞선 세대 수많은 노동자가 목소리를 높여 쟁취한 결과물입니다.   노동조합은 단순히 싸우기 위한 단체가 아닙니다. 노동하는 우리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기꺼이 불편함을 감수하며 우리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조직입니다. 노동조합을 향한 우리의 시선이 차가운 눈총이 아닌, 지지와 응원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마태오
우리가 잃어버린 부끄러움
우리가 잃어버린 부끄러움 오래 전, 한 아이가 제게 귓속말로 들려준 속삭임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려 합니다. 몇 년 전이었을까요. 성당 마당에서 아이들과 어울려 놀다 잠시 화단에 걸터앉아 쉬고 있을 때였습니다. 유치부 아이 하나가 다가오더니 재잘재잘 제게 자신의 세상을 들려주기 시작했습니다. "신부님, 친구 누구는요, 뭐를 좋아하는데요, 저는요 뭐가 좋고요~."  그다지 특별할 내용이 없는 아이의 일상 이야기었고, 저는 가벼운 산책을 하듯 편안하게 그 아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무슨 비밀이라도 말하려는 듯 제게 바짝 다가와 속삭였습니다. "그런데요 신부님, 우리 집은요, 쪼그매서요, 방이 한 개예요."  순간 제 마음의 가볍던 발걸음이 덜컥 멈추어섰습니다. 어디를 향해 발걸음을 마저 이어가야 할지, 난감한 길목에 와버린 기분이었지요. 아이가 자신의 집을 부끄러워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어떤 대답을 해주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이 곤혹스러움이 표현될 겨를도 없이 아이는 마저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그래서요, 잠도 엄마랑 아빠랑 다 같이 잘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 자신의 세상을 들려주는 것만으로도 아이에게 고마울 따름이었는데, 더더욱 고맙게도 아이는 어찌할 바 몰라하는 제게 전혀 예상치 못했던 선물을 들려주었습니다. 아이의 속삭임은 세상 따뜻한 사랑을 담고 있었던 것이었죠. 평수의 부끄러움이 아니고 말입니다. 아이의 속삭이던 그 목소리가 잔향이 되어 묻습니다. 저는 왜 그 순간 곤혹스러웠던 것일까요? 아이가 자신의 좁은 집을 부끄럽게 여겼을 거라 생각한 제 무의식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그러곤 자문해보게 됩니다. 우리 어른들은 그동안 무엇을 부끄러워하며 살아오고 있었던 것일까요. 달동네, 반지하, 임대주택, 다 닳아 떨어진 운동화, 구멍 난 양말, 땀투성이의 작업복. 물질적 궁핍함이 묻어나는 거주지, 변변찮은 차림새, 땀흘리는 직업 등은 부끄러움이 되곤 했습니다. 마음대로 가누지 못하는 몸, 또렷하게 발음되지 않는 말, 좀 더 제한된 인지력. 장애라는 이름의 신체적 혹은 지적인 다름 등도 부끄러운 것으로 여겨지곤 했습니다. 애환이 진하게 배어나는 우리네 삶은 그렇게 그 자체로 가난을 상징하는 것이 되었고, 어째서인지 영문도 모른 채 우리 어른들에 의해 부끄러움의 대상이 되어버리곤 말았습니다. 이 부끄러운 '부끄러움'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우리가 참으로 부끄러움이라고 해야 할 것은 저 가난이 아니겠습니다. 작은 집, 허름한 옷, 짧은 가방끈, 신체적 어려움, 고달픈 노동 등 우리에게 부끄러움이 되어야 할 것은 이와 같은 것들이 아니라 가난이라는 단어로 대변되는 삶을 한낱 부끄러움으로 여기게 하는 우리의 '그 무엇'일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 무엇'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해 나가야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무엇이 참으로 우리의 부끄러움인지를 잃어버린 채, 한없이 부끄러운 삶만을 살다가 부지불식간에 하느님의 공의를 만날 수밖에 없게 되겠지요. 한 아이의 선물과도 같았던 수 년 전 속삭임으로부터 오늘을 거듭 성찰해봅니다. 지금 나의 삶은 정녕 무엇을 부끄러움으로 여기며, 또 무엇을 참 행복으로 여기고 있습니까? "많은 노동자가 하수도를 청소하는 것이 더는 부끄러움이 아니고, 다만 우리의 그 벗들이 쓰레기와 오물을 치우도록 하수도를 채우는 것이 부끄러움이겠다. 또 흔하디흔한 신발을 신고 손님으로 가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자기 구두를 보호하느라 구두 위에 방수용 장화까지 겹쳐 신고 맨발인 사람들을 지나쳐 가는 것이 부끄러움이겠다. 프랑스어나 새로운 소설을 모르는 것이 부끄러움이 아니고, 자신들의 빵이 어떠한 수고를 거쳐 준비되는지도 모르고 빵을 먹는 것이 부끄러움이겠다. ... (노동의 흔적인) 더러운 손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부끄러움이 아니고, 양손에 (노동의) 굳은 살이 없는 것이 부끄러움이겠다." - 톨스토이의 "What Shall We Do?" 중 일부 번역
Fr.비오
아름다움을 만드는 사람들
 아름다움을 만드는 사람들  늦은 밤 집에 들어가는 길은 늘 어지럽게 던져진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쓰레기통은 이미 배부르다고 먹은 것을 토해내고 있고, 쓰임을 다한 상자들은 여기저기 상처를 입은 채 나뒹굴어 있습니다. 비나 눈이라도 오는 날이면 지하철 입구는 질척질척 젖어있고 사람 손이 많이 닿은 이곳저곳은 그 특유의 자국을 새기고 있습니다. 수고롭게 하루를 살아온 사람들의 흔적들을 그대로 간직한 채 밤은 그 모든 것을 끌어안습니다.     그런데 밤사이 기적이 일어납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새벽은 새로운 도시의 얼굴을 보이고 있습니다. 반짝반짝 빛나는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의 손잡이, 텅 비어 무엇이든 소화할 수 있다는 쓰레기통, 깨끗한 거리...... 길거리만 이처럼 새로운 아침을 맞는 것이 아니라 아파트 계단, 학교의 강의실, 관공서의 현관, 어디든 발을 처음 딛는 아침은 정갈하고 깨끗하고 산뜻함으로 우리를 맞아줍니다. 마치 소복이 쌓인 눈에 첫발자국을 내듯이......     이 기적은 누가 이룬 것일까? 이 보이지 않는 손은 누구의 손일까? 고마운 마음도 잠시 또다시 일상에 빠져버리지만, 이 도시를 반짝이게 만드는 신비의 손이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 신비의 손을 가진 아름다운 사람들은 늘 숨어있는 사람들입니다.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 우리가 일하는 시간에는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우리가 안식의 자리에 들면 홀연 등장하여 이 도시를 깨끗하게 만들고는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언젠가부터 이 신비인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청소 노동자의 이름으로, 학교비정규직 노동자의 이름으로, 하청노동자의 이름으로, 6411버스의 첫차를 타는 사람들의 이름으로 그동안 음지에서 일하는 수고의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억울함이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어려운 자리에 있던 것만큼이나 가장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음이 그제야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아하 이분들이었구나! 이분들이 도시를 매일 목욕시켜주는 분들이었구나! 그런데 이분들의 처지는 열악하기만 합니다. 이들의 쉼터 또한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구석쟁이 골방이고 그나마도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합니다. 이 귀한 사람들이 그토록 천대받아왔던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왜 이 귀한 분들을 보이지 않는 사람 취급을 하였을까? 이분들 없이는 단 하루도 말끔한 얼굴을 보이지 못하는 주제에 무엇을 믿고 그리 당당하게도 사람을 함부로 부려왔을까? 하느님 보시기에도, 인간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기에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고 보면 저에게도 근본적인 차별이라는 것이 깊게 담겨있었습니다. 배우지 못한 사람, 가난한 사람, 버려진 사람으로 의식 저 너머에 새겨져 있던 분들이었습니다.     이제 아름다운 사람들이 그 모습 그대로 드러났으면 좋겠습니다. 이 아름답고 깨끗한 도시를 누가 만들었는지를 물었을 때 서슴없이 손을 들어 가리켜 그 위대한 업적에 대하여 고마움을 노래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시민들이 모두 고마움을 드러낸다면 이분들을 하찮게 여기고 마구 부리는 사람들도 이분들이 하시는 일에 대해 알맞은 대우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용역에 용역을 더하는 하청의 구조도 끊을 수 있을 것입니다. 회사나 정부의 중요하고 귀하다 하는 자리에 하청에 재하청을 도입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생각을 나누다’에도 매번 이분들이 드러나는 이야기를 연재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Fr.나승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