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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omilia 2018-04]2018년 10월 14일 연중 28주간 강론
    • 등록일 2018-10-16
    • 작성자 관리자
    • 조회수 66
  • 2018년 10월 14일 연중 28주간 주일 강론

     

    노동사목위원회 부위원장

    이주형 요한 신부

     

    바야흐로 완연한 가을로 접어들었습니다. 숨 막히게 더웠던 지난여름의 기억이 아직 선한데 이제는 거리 곳곳에서 두툼한 옷을 입은 이웃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10월 중순을 넘기며 이제 올 한 해도 얼마 남지 않았음이 실감 납니다. 곧 있으면 이 가을도 낙엽이 떨어지는 시기를 지나 죽음과 소멸을 상징하는 겨울로 접어들겠지요. 이러한 계절의 변화 속에서 우리는 종말론적으로 정향된 인간의 삶을 되돌아보며 겸손하게 우리의 삶을 성찰합니다.

     

    배철현 교수의 “심연”이라는 책에서 저자는 ‘본다’라는 행위가 세 가지 차원이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첫째 그냥 대충 보는 것, 둘째 조금 유심히 살펴보는 것, 세 번째로 자세히 관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랜 시간을 몰입하여 자세히 관찰할 때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그는 이야기합니다. 자연 안에서 이루어지는 작은 생물들의 규칙적인 움직임, 하늘 위 달과 별들의 움직임 등과 같은 자연법칙들을 비롯해서 보이지 않는 이 세상의 순리와 섭리들이 보인다고 이야기합니다.

     

    신앙인은 우리에게 이러한 통찰은 매우 익숙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자세히 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신앙의 내용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고 곰곰이 생각하지 않으면 그 내용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핵심 내용인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은 믿음을 통해서 도달하는 세계이니까요.

     

    물론 신앙인에게 피안의 세계만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세의 삶도 중요합니다. 특별히 신약성경의 루카복음은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들에게 큰 관심을 나타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차안의 세계를 통해 피안에서 겪을 깊고도 충만한 참된 행복을 엿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참된 행복이란 사랑과 용서, 자비와 화해가 가득한 상태입니다. 인간은 차안과 피안의 연속선상에서 그러한 신적인 행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체험이 바로 ‘구원의 현재화’라는 신학적 개념과도 연결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용서받지 못함, 미움, 증오와 같은 불행도 겪을 수 있습니다. 영화 신과 함께 인과 연 편에서 강림차사역을 맡았던 배우 하정우씨의 대사가 떠오릅니다. 극 중에서 하정우는 아버지의 죽음을 모른 척 함으로 그의 죽음을 초래했다는 잘못에 괴로워하며 천년이나 지나 법정에 서서 한탄합니다. “아버지에게 용서를 빌 수 없다는 게 저에게는 가장 큰 지옥이었습니다.”

     

    용서받지 못했다는 고통만큼 큰 고통이 또 있습니다. 죽은 다음에 아무도 나를 기억해주지 않으며, 어떤 사람도 나를 위해 기도해주지 않고 종말에 들어설 그 최후의 법정에서 내가 그 어떤 변론도 누구로부터 받지 못한다는 참담함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베풀지 못함, 어려운 이웃을 모른 척함, 내 욕심과 이익만을 위해 살았을 때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자고로 동서고금의 인색한 부자들은 죽어서 좋은 일을 겪지 못한다는 것을 많은 소설과 이야기들이 전합니다(루카 16장,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 그 내용은 결국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예수님 말씀입니다(마태 19,24).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가진 것을 다 팔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청년은 울상이 되어 떠나갔다고 전합니다(마르 10,22). 이처럼 제물을 포기하고 그 집착과 애착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보여줍니다. 물론 자신의 재산을 포기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포기하는 것은 재물에 대한 무의미한 욕심입니다. 내려놓는 것은 썩어 없어질 헛되고 허망한 재화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입니다. 그리고 얻는 것이 훨씬 많습니다. 베풀고 나눌 때 얻는 따스한 사랑과 기쁨, 건강하고 행복하며 홀가분한 영혼입니다. 재화의 올바른 선용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얻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기억되는 사람, 누군가의 위로와 지지를 받는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재물을 하늘에 쌓는 것입니다(마태 6,20). 사도행전에서 천사가 로마 백인대장 코르넬리우스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너의 기도와 너의 자선이 하느님 앞으로 올라가 좋게 기억되고 있다(사도 10,4).

     

    주일인 14일 오후 수백 명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서울 세종로에서 집회를 열고 이주 노동자들이 겪는 어려움을 호소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로서 겪는 차별과 노동 현장에서의 부조리와 폭압을 견디다 못해 목소리를 낸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달 22일에는 미얀마 출신 딴저테이씨가 김포의 건설현장에서 추락사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를 둘러싼 상반된 시각이 우리 사회에 존재하지만 적어도 성숙한 사회라면 그들을 이웃으로 대하고 그들의 어려움에 걱정과 위로를 건네고 그들에게 도움을 주려는 사고가 우선시 되고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도하고 자선을 행하며 내 것을 기꺼이 나누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를 닮음, 성덕의 길로 나아가는 신앙인의 성숙한 삶입니다.

     

    우리 사회도 이런 이웃들이 많아야 하겠습니다. 각자 서로 더 벌려고만 하고, 내 욕심만 생각하고 심지어 사리사욕에 빠져 약한 이의 것을 빼앗을 궁리만 하는 그런 세상이 아니라 베풀고, 나누고 도와주고 배려함으로 사랑과 용서가 가득한 사회가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우리 주변에 그렇게 소외되고 어려운 이웃들이 있습니다. 더 크고 더 깊으며 더 충만하고 참된 행복을 위해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손길을 내밀 수 있는 한주가 되면 좋겠습니다.

     

     

    “성령에 힘입어 우리는 우리의 전생애에 걸쳐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야합니다.”

    교황 프란치스코 회칙,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21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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