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의 新새벽]④‘워라밸’ 천국, 초과 노동시간 저축 후 휴가·돈으로 뽑아 쓴다
ㆍ노동시간 단축 앞선 유럽은
독일·스웨덴 ‘노동시간 저축제’
산업별 노사 간 단체협약 세분화
‘일과 삶 균형’ 노동생활 재구성
네덜란드, 모범적 노사정 대타협
시간제 일자리 늘려서 ‘공생’
노동 유연성과 안정성 확보
프랑스, 고용 창출기업에 보조금
성장률 높이고 실업률 내려
독일과 스웨덴, 프랑스 등 유럽 선진국은 이미 주당 노동시간이 30~40시간에 맞춰져 있다. 생산성을 유지하면서도 ‘일과 삶의 균형’이 가능토록 제도를 발달시켜온 결과다. 경기침체기에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위기를 극복한 경험도 있다. 유럽 노동시간 단축의 특징은 생애주기에 걸쳐 소득과 노동시간을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도록 선택권을 확대하고, 여성들의 경제적 진출을 장려하는 방향으로 발달해왔다. 이 과정에서 시간제 일자리 비중이 높아진 점도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특히 노동시간 단축 논의가 노사관계의 활성화와 협력관계에도 중대한 계기로 작용한 유럽의 경험은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 독일 ‘노동시간 저축제’
21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를 보면 독일은 2016년 기준 연평균 노동시간이 1363시간으로 39개국 가운데 가장 짧다. OECD 평균 1763시간보다도 400시간이 짧고, 연간 2069시간을 일하는 한국보다는 706시간이나 덜 일한다. 독일은 1994년 노동시간법 제정을 통해 ‘1일 8시간제’를 도입했다. 다만 연장노동은 6개월 동안의 노동시간을 평균해 하루 8시간을 넘지 않으면 최대 10시간까지 가능하다. 가령 3개월은 한 주에 50시간씩 일하게 하고 나머지 3개월은 한 주에 30시간씩 일을 시키더라도 6개월 평균 하루 8시간 노동한 것이 되므로 법정 노동시간을 위반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독일 기업의 90%는 초과 노동수당을 절감하기 위해 일명 ‘노동시간 저축제’를 도입했다. 일종의 유연근무 체제다. 직원들이 초과로 일한 시간을 저축해뒀다가 필요할 때 쓸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한 직원이 10시간을 일했다면 2시간이 적립된다. 연 최대 250시간을 저축할 수 있으며, 이를 넘기면 나중에 한 달간 장기 휴가도 갈 수 있다.
독일은 노사 간 합의를 통해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데에도 노동시간 단축을 이용했다. 1993년 폭스바겐은 경영난으로 3만여명을 감축해야 할 상황에 직면했다. 하지만 폭스바겐 노사는 임직원의 노동시간을 20% 단축하는 대신 인건비 20%를 삭감하는 방안에 합의해 대형 해고를 막았다. 경기가 회복되자 경제위기 이전 수준으로 노동시간을 되돌리는 등 사용자가 원하는 유연성과 노동자가 원하는 안정성을 모두 챙겼다는 평가다.
법적 규제의 차원을 넘어 산업단위 노조와 사용자협회가 체결하는 단체협약 등을 보면 일과 생활의 균형을 위한 계획이 뒷받침되는 것도 확인된다. 한국노동연구원의 ‘노동시간과 일·생활 균형’ 보고서를 보면 독일의 주요 단체협약 가운데 ‘주당 파트타임 노동의 길이 선택’ ‘재택근무할 수 있는 권리’ ‘파트타임 노동자들에게 연간 보너스 지급’ ‘육아휴직 동안의 추가 훈련’ 등이 들어 있다. 보고서는 “노동자들이 짧아진 시간에 맞춰 그들의 노동시간과 노동생활을 재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라고 밝혔다. 독일 연방고용공단 산하 고용연구소(IAB)에 따르면, 2005~2015년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임금노동자는 290만명 증가한 반면 풀타임 노동자 증가는 100만명 미만이었다.
■ 스웨덴 ‘단체협약의 힘’
스웨덴의 연평균 노동시간은 2016년 기준 1621시간이다. 스웨덴은 1982년 노동시간법을 통해 주당 40시간 노동제를 채택했다. 스웨덴은 업종별 단체협약을 통해 주당 노동시간을 1년간에 걸쳐 평균해 산정할 수 있도록 규정한다. 스웨덴 모델이 돋보이는 점은 법적 강제보다 업종별로 사회적 파트너들이 산업 전체에 걸쳐 협약을 마련하도록 한 점이다. 한국노동연구원 보고서를 보면 스웨덴은 근로시간법 또한 선택적이며, 부분적으로 혹은 전체적으로 산업별·사업장별 단체협약을 통해 대체될 수 있다. 주당 근로시간이 40시간이지만, 1일 법정 최대 노동시간은 규정하지 않았다.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화학, 섬유, 목공, 기술 등 약 60만명의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에게 적용되는 산업별 협약을 체결했다. 또 ‘생애노동시간’이라는 협약이 있는데, 연간 0.5%의 노동 수입이 노동시간 계좌에 저축되는 것이다. 이 저축계좌는 휴가를 가거나 노동시간을 단축할 때 사용할 수 있으며 현금으로 인출할 수도 있다.
스웨덴은 7세 미만 자녀를 둔 여성 고용률이 OECD 국가에서 가장 높을 정도로 시간제 일자리, 부모휴가 등의 제도적 지원이 뒷받침된 국가다. 스웨덴은 남성에게 유급 부모휴가를 실시한 최초의 국가이자, 자녀 한 명당 길게는 480일까지 부모휴가를 쓸 수 있는 국가다.
한편 지난해 1월 예테보리에서 종료된 정부 차원의 노동시간 단축 실험은 생산성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알츠하이머 등 노인 환자들을 돌보는 스바르테달렌스 요양병원 간호사 68명의 근로시간을 2015년부터 2년간 주 40시간에서 30시간으로 줄이는 대신 임금은 같게 유지했다. 병가율, 생산성 등을 종합측정하는 실험이었다. 그 결과 직원의 병가가 4.7% 감소했고, 결근 역시 줄어 생산성이 오히려 높아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총비용은 인건비 증가로 22% 늘었다.
■ 네덜란드 ‘바세나르 협약’
네덜란드의 연평균 노동시간은 2016년 기준 1430시간이다. 1996년 노동법 개정을 통해 ‘주 40시간제’를 도입했다. 네덜란드는 13주에 걸쳐 노동시간을 산정해 주당 평균 40시간 이내가 되도록 규정하고 있다. 단체협약으로 정할 경우 13주간 주당 평균 50시간, 1일 최대 10시간까지 일할 수 있다.
네덜란드도 노동시간 단축을 경제위기 극복에 이용한 경험이 있다. 1980년대 초 네덜란드의 실업률이 10%를 넘어가자 노사정은 1982년 노조가 노동자의 임금 인상 요구를 억제하는 대신 기업이 노동시간 단축 등으로 일자리를 늘리는 ‘바세나르 협약’을 맺었다. 아직까지도 노사정 대타협의 모범으로 평가받고 있다. 기업은 평균 주 40시간이던 노동시간을 주 38시간으로 단축하고 시간제 일자리를 늘렸다. 그 결과 1994년 63.9%였던 고용률은 70%를 넘었다. 경제성장률은 3.1%로 유럽연합(EU) 평균인 2.1%를 넘어섰다.
EU 공식 통계기구인 유로스타트(Eurostat)에 따르면 2003년 기준 EU 15개국 평균 파트타임 노동자 비율은 11.6%다. 반면 네덜란드는 32.8%다. 하지만 네덜란드는 1996년 ‘노동시간에 따른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 등 풀타임과 파트타임의 임금, 휴가 등의 격차를 없앰으로써 시간제 일자리의 질이 떨어지지 않도록 했다. 이 법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파트타임 노동자를 해고할 수 없게 해 시간제 일자리의 고용안정성도 꾀했다.
■ 프랑스 ‘일자리 창출’
프랑스의 연평균 노동시간은 1472시간이다. 프랑스는 1997년 총선에서 집권한 사회당이 선거공약 이행 차원에서 주 39시간 노동을 주 35시간으로 단축했다. 당시 노동부 장관이었던 마틴 오브리의 이름을 딴 일명 ‘오브리법’은 노사 간 단체협약을 통해 연간 주당 평균 35시간을 넘지 않고, 연간 1600시간 이내에서 탄력적으로 운용토록 규정하고 있다. 다만 이 역시 1일 10시간, 1주 48시간을 넘을 수 없도록 하고 있다. 당시 프랑스 정부는 실제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고용을 창출하는 기업에 대해 정부가 사회보장분담금을 삭감해주는 형태로 보조금을 줌으로써 노동시간 단축을 유도했다.
프랑스는 35시간 근무제를 도입하지 않는 경우에도 ‘보상휴식’을 통해 1일 10시간, 주당 48시간을 초과해 근무하지 않도록 강제하는 독특한 시스템을 취하고 있다. 노동자에게는 1일 11시간 이상, 주당 24시간의 휴무를 강제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루 노동시간은 13시간을 넘을 수 없게 되어 있다.
OECD는 프랑스의 35시간 근무제가 특히 신규 고용 창출과 관련해 긍정적인 효과를 냈다고 봤다. 실제로 주 35시간 노동제는 1998~2002년 35만개의 신규 일자리를 창출해 1997년 12.6%인 실업률을 8%대까지 떨어지게 했다. 일자리의 질도 나쁘지 않았다. 직접고용이 20만건, 임시직이 15만건이었다. 여가의 확대는 소비 활성화로 이어져 프랑스 경제는 연간 2~3%의 지속적인 성장을 기록하기도 했다.
한국도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늘어나고, 노동시간 단축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면서 적어도 제도 측면에서는 유럽 국가들에 크게 뒤처지지 않는 수준이다.
조성재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한국 기업들은 탄력적 근로시간제 등 기존 제도도 잘 활용하지 않는 측면이 있다”면서 “일과 가정의 양립을 위해서는 근로시간 단축이 기본 전제가 되어야 하며, 생애주기에 걸쳐 소득과 시간을 더욱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다양한 정책들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유설희 기자 sorry@kyunghyang.com
* 출처 : 경향신문 2018. 6. 21
* 해당원문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6212222005&code=9407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