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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겨레]50년 제화공 “구두 하나 만들고 받는 돈 7000원”
    • 등록일 2018-05-04
    • 작성자 관리자
    • 조회수 196
  • 50년 제화공 “구두 하나 만들고 받는 돈 7000원”

     

    탠디 하청 제화 노동자들 본사 진입 점거 농성

    “50년 경력에도 공임은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시급보다 낮아”

    “30만원 구두 한 켤레 공임 7000원, 2000원 더 올려달라”

    농성 참가자 모두 50·60대… “구두 제작은 나이 들수록 적자”

    본사와 직접 고용 관계도 복원해달라 요구

     

    26일 오후 유명 수제화 브랜드 탠디의 하청업체 소속 제화 노동자 60여명이 서울 관악구 인헌동 탠디 본사 3층에서 점거 농성을 벌이고 있다.

     

    26일 오후 3시10분 서울 관악구 봉천동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 1번 출구.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린 60여명의 노동자들이 일사불란하게 대열을 정비해 함께 뛸 준비를 하고 있다. 목표 지점은 까치고개 삼거리 방향으로 300m 떨어진 건물 3층. 그곳은 구두류 제조업체 ‘탠디’ 본사다. 이들은 이날 ‘탠디’ 본사를 점거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 회사 쪽에서 점거 계획을 눈치채고 출입구를 막을까 봐, 노동자들은 300m 오르막을 쉬지 않고 뛰었다.

     

    건물 안 폭 1m 좁은 복도에 남성 수십 명이 들이닥치자 평온하게 사무실에 있던 직원 10여명은 화들짝 놀라 양쪽으로 비켜섰다. 누군가는 어디론가 급히 전화를 하고, 누군가는 한 귀퉁이에 모여 창문 밖 상황을 조심스레 살폈다. 노동자들은 “밀어, 밀어”를 외치며 3층 복도진입에 성공하자마자 “기물 파손은 안 됩니다”라고 달뜬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곧, 복도에 주저앉아 농성을 시작했다. 이른바 ‘4.26 탠디 대첩’이었다. 뛰느라 참았던 숨을 가쁘게 내쉬는 이 50~60대의 남성들이 급작스레 점거 농성에 들어간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켤레당 7000원 공임, 2000원 더 올려달라는 요구

     

    점거 농성에 나선 이들은 탠디의 하청업체와 계약을 맺고 구두를 짓는 제화공들이다. 국내 유명 수제화 브랜드 탠디의 제화공 90여명은 지난 6일 파업에 들어갔다. 이들의 요구는 우선 현재 켤레당 6500원~7000원 수준인 공임을 2000원 인상해달라는 것이다.

     

    “탠디는 30만원이 넘는 신발을 팔면서 제화공들에게 켤레당 6500원~7000원의 공임을 줍니다. 지난 8년 동안 최저임금이 두 배 가까이 오르는 동안 제화 노동자들의 공임은 한 푼도 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2000원 더 달라고 하는 우리 요구가 큰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이 우리 가족들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제화공들을 대표하는 정기만 민주노총 서울일반노동조합 제화지부장의 호소다.

    하청업체와 도급계약을 맺는 개인사업자 신분을 풀어달라는 요구도 있다. 제화공들은 탠디의 5개 하청업체로부터 주문서와 함께 배정된 일감만큼 탠디의 비품과 원자재를 받아 탠디의 요구대로 구두를 만든다. 그런데도 법적으로 노동자가 아닌 ‘소사장님’(개인사업자)이라는 이유로 4대 보험과 퇴직금, 연차 휴가 등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덤프트럭기사와 학습지교사, 보험모집인과 방과후 강사, 대리기사와 퀵서비스기사, 택배기사 등과 같은 ‘특수고용 노동자’인 것이다. 특수고용 노동자들은 회사의 지시와 통제에 따라 노동을 제공하면서도 사실상 개인 사업자로 ‘위장 고용’된 채 부당노동 행위나 장시간 노동 등에 시달린다. 이렇게 하면 회사는 노동관계법에 의해 노동자에게 주어지는 보호를 무력화하거나 세금과 사회보험 부담금을 회피할 수 있는 반면, 노동자는 정당한 노동권을 인정받지 못하는 모순에 처한다.

     

    ■구두 짓는 경력이 늘어갈수록 삶은 나빠진다

     

    더 큰 문제는 도제식으로 일을 배워 구두 짓는 장인이 된 이들의 삶이 갈수록 나아지긴커녕 더 나빠지고 있다는 점이다.

     

    마흔 아홉살 제화공 박완규는 이번 농성 참가자 가운데 막내다. 전북 완주군 봉동읍에서 태어난 박완규는 고등학교 1학년 때인 1985년 학교를 자퇴했다. 소작농을 하던 가정형편에 학교에 내야 하는 등록금은 매번 밀리기 일쑤였다. 17살 박완규는 등록금 납부를 독촉하는 서무실에 불려가는 게 죽을 만큼 “쪽팔렸다.” 그래서 학교를 그만뒀다. 그날, 아버지에게 죽도록 매를 맞았다.

     

    돈을 벌기로 마음먹은 17살 박완규는 봉동읍을 떠나 사돈댁이 하던 경기도 성남의 한 식당에서 1년 동안 배달 일을 했다. 18살이 되던 해, 외가에 보낸 편지에 쓰인 식당 주소를 보고 찾아온 이모부가 박완규를 데리러 왔다. 그 이모부가 바로 제화공이었다. 그 길로 박완규는 명동에서 구두 만드는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아시안게임이 열리던 1986년의 일이다.

     

    명동은 ‘살롱화’로 불리는 수제화의 전성기를 이끌던 중심이었다. 빳빳한 양복을 입고 날렵한 구두를 신는 멋쟁이들이 찾아왔다. 이들은 제화공들을 ‘구두장이’라고 불렀다. 첫차를 타고 출근해 막차를 타고 퇴근하던 18살 박완규는 고된 일을 감당하지 못해 아침마다 피를 봤다. 세수하려고 받아놓은 대얏물을 내려다보면 코피가 흘러 물이 빨갛게 변했다. 그렇게 일해 받은 돈이 한 달에 17만원. 짜장면 한 그릇이 700원이던 시절, 박완규는 용돈 3000원만 남기고 나머지는 남동생 셋이 기다리는 봉동읍으로 부쳤다.

     

    “스무살이 되니 더 이상 코피가 나지 않더군요.”

     

    박완규가 말했다. 그리고 그는 30여년 제화 노동자 인생 가운데 유일하게 기뻤던 순간으로 “엄마와 작은 엄마, 고모들의 구두를 직접 만들어 선물했을 때”를 꼽았다. 그러던 18살 박완규가 어느덧 32년 차가 됐는데, 지금은 구겨진 얼굴로 점거 농성 현장에 있다.

     

    그의 삶은 코피 흘리던 그 시절보다 나아졌을까? 32년 차 제화 노동자 박완규는 파업 전까지 하루 평균 15~16시간 일하며 25개 정도의 구두를 지었다. 구두 하나당 6500원씩 계산하면 일당은 16만2500원이다. 한 달에 20일 일한다고 치면 325만원이 떨어진다. 이 가운데 ‘소사장님’이 내는 세금 3.3%(10만7250원)를 뗀다.

     

    이것도 일감이 제대로 있을 때 얘기다. 성수기에는 하루 25개보다 더 지어서 370만원까지 벌 수 있지만, 비수기에는 200만원대 초반을 겨우 번다. 개인사업자로서 아무런 보호 장치가 없고, 4대 보험조차 없기 때문에 최소 월 300만원은 벌어야 가족을 부양할 수 있다. 장시간 노동에 힘이 부쳐 제때 작업을 마치지 못하면 토요일도 없이 일할 때가 부지기수다.

     

    16일 오후 서울 관악구 ‘탠디’ 제화공장 작업대에 원자재가 쌓여있다. 제화업체 탠디의 제화공 98명은 지난 6일부터 열흘째 파업 중이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50년 동안 한 번도 자랑스러운 적이 없다”

     

    점거 농성 중인 복도 다른 쪽에 채동식이 앉아 있다. 예순 여덟살인 채동식은 이 농성장에서 가장 나이가 많다. 파업 전까지 채동식은 매일같이 새벽 5시 반에 출근해 종일 구두를 짓고 자정 무렵 퇴근했다. 50년 동안 그렇게 구두를 짓고 또 지었다.

     

    전쟁이 났던 1950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난 채동식은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손에서 자랐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안일을 돕던 채동식은 “기술을 배우면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17살 때부터 구두 기술을 배웠다. 강산이 5번이나 변하는 시절이지만, 그는 그 경력이 한 번도 자랑스러웠던 적이 없다.

     

    “제화 기술자로 살아오면서 지금껏 한 번도 인간적인 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어요. 50년 구두장이가 구두 한 켤레를 만들어 받는 돈이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의 시급 7350원보다 낮은 게 말이 되나요?”

     

    채동식이 남 보기 부끄럽다는 투로 말했다. 50년 세월은 장인이라는 명예보다 몸에 남긴 멍에로 기억된다. 그는 팔을 직선으로 펴지 못한다. 팔 관절이 닳아 수술을 해야 하지만, 재활 기간 동안 일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병원 치료를 포기했다.

    “팔이 굽어도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으니 앞으로 수술대엔 오르지 않을 생각입니다.”

     

    2000년 이전엔 제화공은 모두 ‘노동자’였지만 대형 패션업체가 노무 비용을 줄이려고 ‘소사장제’를 잇달아 도입하면서 현재는 월급이나 퇴직금을 받는 이가 거의 없다. 신발창과 굽을 만드는 저부 공정을 하는 한 제화공의 모습. 민주노총 서울일반노조 제화지부 제공.

     

    ■기계화, 그리고 ‘소사장제’라는 두 번의 시련

     

    젊은 시절이던 1980년대에는 이들에게 그나마 기술을 배운다는 자부심이라도 있었다. ‘구두장이’라는 호명도 나쁘지 않았다. 10년째 탠디 구두를 만드는 45년 차 제화공 김아무개(63) 씨는 “1978년께 켤레당 최고 2400원까지 받아봤다. 그땐 정말 일하는 게 재미있었고, 웬만한 월급쟁이가 부럽지 않았다”고 말했다.

     

    제화공들의 첫 번째 시련은 1980년대 후반 제화업계에 기계화가 도입되면서 찾아왔다. 손으로 짓던 구두 밑창을 기계에서 철형으로 찍어냈다. 장이들이 직접 가위로 밑창을 오릴 필요가 없게 됐다. 기계는 그렇게 장이들의 몫을 앗아갔다. 제화 노동자들의 수입이 30% 가까이 떨어졌다.

     

    그래도 물가상승률에 맞춰 공임은 꾸준히 1년에 200원~300원씩 올라줬다. 노동권을 보호받던 시절의 얘기다. 남들처럼 근로소득세를 냈고, 4대 보험에도 가입됐다. 4대 보험 적용을 받으니, 당연히 퇴직금도 나왔다. 하지만 IMF 구제금융이 있은 직후인 2000년대 초반 두 번째 시련이 강하게 들이닥쳤다. 탠디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제화업체가 이른바 ‘소사장제’를 도입했다. 사실상 노동자 신분이던 제화공들을 한순간에 개인사업자인 ‘특수고용 노동자’로 전환한 것이다. 그 시절을 박완규는 이렇게 기억한다.

     

    “당시엔 탠디가 아니라 지금은 사라진 유명 브랜드 ㅅ사의 구두를 지을 때였어요. 어느 날 사장이 현장 기술자 열다섯명을 찾아와 ‘명의를 좀 빌려달라’고 울며 빌어요. 주민등록등본을 가져다주면 5300원이던 당시 공임을 1000원 더 올려 주겠다는 거예요. 제법 괜찮은 조건이라고 생각했어요. ‘회사가 살아야 나도 사니까’라는 생각도 했죠. 다른 기술자들과 함께 등본을 줬습니다. 그랬더니 저와 동료들이 어느 날부터 업체 소속 노동자가 아니라 개인사업자 신분인 ‘소사장님’이 된 거죠. 말이 좋아 사장이지 자기 돈 한 푼 없이 사장된 사람 봤어요? 우리는 내 기술, 내 연장으로 구두만 만들 뿐인데 4대 보험, 퇴직금 등 노동자로서 보호는 못 받고 세금 부담만 떠안고 있습니다.”

     

    회사가 제공한 비품과 원자재를 이용해 회사가 요구한 대로 구두를 만들었지만, 이들은 그러니까 노동자가 아니라 개인사업자라는 것이다. 최근 법원은 이런 관행에 제동을 걸고 제화공들의 노동자성을 인정했다.

    지난해 2월 서울고법 민사1부(재판장 김상환)는 탠디에서 제화 노동자로 일하다 2000년대 초반 박완규처럼 ‘개인사업자 등록’을 한 퇴직노동자 9명이 회사를 상대로 낸 임금 청구소송에서 이들의 근로자성을 인정하고 퇴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1심과 같은 판단이었다. (▶관련 기사 : 법원 “제화공 근로자성 인정… 회사가 퇴직금 줘야”)

     

    제화업체 탠디의 제화공 98명이 지난 6일부터 열흘째 파업 중이다. 16일 오후 파업 중인 서울 관악구 제화공장의 모습.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노동자성’ 인정 법원 판결 나오자 더 집요해진 탠디

     

    하지만 탠디는 법원에서 패소한 뒤 더 집요해졌다. 제화공들 사이에선 일감이 줄어서 곧 본사가 일부 제화공들과의 계약을 해지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안 그래도 본사 일감에 따라 생계가 좌우되는 제화공들은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다. 퇴직 노동자들의 퇴직금 인정 판결이 기존 노동자들의 삶을 위협하는 역설적 상황을 낳은 것이다.

     

    탠디 본사는 제화공들에게 ‘본사 말고 하청업체와 계약하면 받아야 할 퇴직금의 70~85%를 일시불로 주겠다’고 설득했다. 본사와 직접 도급계약을 맺었던 제화공 50여명은 이렇게 해서 지난해 8월과 올해 3월, 하청업체 2곳으로 나가게 됐다. 두 하청업체는 탠디의 전 개발이사와 실장이 대표로 있는 회사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탠디가 퇴직금의 70~85%를 일시불로 준다고 할 때 노동자들이 그 돈을 ‘공돈’처럼 느꼈던 것도 사실이에요.” 법원의 거듭된 판결에도 제화공들 스스로 퇴직금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박완규의 말이다.

     

    하지만 탠디는 이들을 하청업체로 내보내는 데 성공하자 두 하청업체에 자사의 서브 브랜드인 ‘멜빈’과 ‘미셸’의 작업 물량을 대거 내려보냈다. 본사와 직접 도급 계약을 맺었던 당시 켤레당 7500원 하는 고급화만 만들었던 제화공들은 하루 아침에 6500원짜리 저가화 작업을 맡게 됐다. 일을 하는데 드는 시간이나 노동력은 그대로인데 공임만 1000원 깎였다. 하루 25켤레, 한 달 20일 기준으로 계산하면 월 50만원의 소득이 줄어든다.

     

    탠디는 여러 해에 걸쳐 특수 공임도 지속해서 깎았다. 특수 공임이란, 신발에 쿠션을 깔거나 이른바 ‘가보시 힐(앞굽이 통굽인 신발)’ 굽을 넣는 특수 작업을 할 때 기본 공임보다 500원~1000원씩 더 받는 돈을 말한다. 제화공들은 “법원의 퇴직금 지급 판결이 나온 뒤 그 지출을 메꾸려고 더욱더 심하게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탠디의 ‘갑질’은 더 있다. 박완규는 2년 전 작업 실수로 불량품을 하나 만들었다. 구두 하나 지어서 6500원을 받는 박완규인데, 회사는 불량품이 나왔으니 구두 판매가인 30만원을 대금에서 공제하겠다고 했다. 제품을 출고하기 전 완제품을 검사하는 본사의 검품과에도 책임이 있는데, 회사는 고스란히 제화 노동자인 박완규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했다.

     

    제화업계에 이런 일은 심심찮게 발생한다. 박완규는 30만원을 공제하겠다는 탠디의 방침에 반발했다가 회사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회사는 그 뒤로 하루 일감을 확 줄여 다섯 켤레 일감만 줬다. 제화 노동자들이 갖은 불이익을 당하면서도 공임과 직접 고용 문제 등을 요구하는 단체행동을 오랫동안 하지 못했던 까닭이다.

     

    ■늙어가는 몸,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제화공들

     

    이들이 마침내 나선 건 8년째 동결된 공임이나 탠디의 온갖 갑질 문제도 있지만, 결국은 늙어가는 몸 때문이다.

     

    채동식처럼 수십 년 경력의 제화공들은 엄지손톱이 기형적으로 납작하게 눌려 있고, 손바닥 곳곳에 굳은 살이 박혀 있다. 수십 년 동안 구두를 지은 ‘구두장인’이면 경력이 쌓일수록 기술이 노련해진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노련함이 쌓이는 속도보다 더 빨리 닳아 없어지는 게 몸이다. 온종일 앉아서 구두에 못을 박고 가죽을 매만지는 이들에게 몸은 곧 ‘연장’인데, 나이가 들수록 손은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느려진다. 일흔을 바라보는 채동식 같은 제화 노동자들이 아무리 손을 바삐 움직인들 젊은 기술자들보다 작업량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채동식처럼 장애를 안고 사는 이들도 부지기수다.

     

    수십 년 경력의 제화 노동자들의 엄지손톱은 기형적으로 납작하게 눌려있다.

     

    이렇게 하루하루 나빠만 지는 상황을 겪다 보면, 은퇴 뒤가 두렵지 않을 수 없다. 일을 그만두면 그나마 버티던 몸도 한꺼번에 무너지기 십상이다. 이들이 회사의 갖은 ‘갑질’과 ‘블랙리스트’ 압박에도, 굳이 늙은 몸을 이끌고 점거 농성에 나선 까닭이다. 이들은 노후를 위해 족쇄 같은 ‘소사장제’ 계약제도의 폐지와 수년간 깎여온 공임의 정상화를 바랄 뿐이다.

     

    “올해 나이 오십인 제가 구두만 만든 32년 동안 데모에 디귿자를 들어봤겠습니까? 이런 일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고, 선배님들도 당연히 없었습니다. 바깥세상 8년 동안 버스 요금과 가스 요금이 몇 번이나 올랐는데, 우리는 8년 동안 임금이 오르긴커녕 특수 공임마저 깎였습니다. 내가 성질이 사납거나 사상이 사나워서 점거에 나선 게 아니에요. 살려고, 살아보려고 여기 온 겁니다.”

     

    박완규의 목소리가 구두 만질 때 다루는 연장처럼 거친 쇳소리를 냈다.

     

    ■‘보릿고개’가 지겨웠던 제화공들이 다시 부르는 ‘보릿고개’

     

    저녁 8시 반. 제화공들이 점거 농성을 한 지 5시간이 지났다. 대치 상황에 경찰도, 본사 직원도 지쳐갈 무렵 짜장면으로 저녁을 때운 제화공들 사이에 노랫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야야 뛰지 마라/배 꺼질라/가슴 시린 보릿고개 길/주린 배 잡고/물 한 바가지/배 채우시던/그 세월을 어찌 사셨소/초근목피의 그 시절/바람결에 지워져 갈 때/어머님 설움/잊고 살았던/한 많은 보릿고개여.”

     

    구형 스마트폰에서 흘러나온 노래는 트로트 가수 진성의 <보릿고개>다. 보릿고개가 지겨워 고향을 떠나 구두 기술 하나로 몸을 지탱해온 이들은 다시 그 시절 보릿고개를 떠올린다. 최소한 이들의 삶이 나아진다는 희망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겨레>는 제화 노동자들의 호소와 요구 사항에 대해 탠디 쪽의 해명을 듣기 위해 여러 차례 연락을 했지만, 탠디 쪽은 답을 보내오지 않았다.

    선담은 기자 sun@hani.co.kr

     

     

    * 출처 : 한겨레 2018. 4. 29

    * 해당원문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4254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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